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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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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독후감

데이비드 리스의 현대판 소설, <도덕적 암살자>

by 와룡 2008. 10. 6.

사실 산지는 꽤 되었다. 데이비드 리스의 이름이 붙었으니 출판하기 무섭게 샀지만, 왠지 그답지 않은 "현대판 소설"이라고 해서 당장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읽어보니 처음의 그 느낌이 맞았다는 확신이 든다. 그렇다고 이 책이 영 꽝이라는 말은 아니다. 기존의 데이비드 리스의 중세풍 소설과는 느낌이 너무나 다를 뿐.

중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한 멋진 사나이의 이야기를 기대했던 나로써는 타락한 미국의 뒷골목을 그린 이 이야기를 기분좋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덕적 암살자'인 멜포드는 나름대로 미후엘 류의 매력을 약간 느끼게 한다. 현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시비거는 사람들을 대하는 그만의 방식이 독특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말이다.

사실 이 '도덕적 암살자'라는 것은 이 책 뿐 아니라 여러곳에서 마주친 바 있다. 굳이 따지자면 <죄와 벌>이 그 전신이다. 이어서 본래부터 좋아라하던 드라마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제목이 맞던가?)'에서도 그런 내용이 이어진다.
나는 그들 '도덕적 암살자'를 지지한다. 세상에는 법으로도 심판할 수 없는 악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항상 '올바른' 판단을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도덕적 암살자가 되는 것에 나는 찬동한다. 하지만 세상에 어떻게 항상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서 드라마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도덕적 암살자였던 주인공은 회의를 느끼고 자살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지만 멜포드는 자살하지 않는다. 자신이 언제나 옳다고 너무 확신하기 때문일까. 자신이 벌인 살인조차 악인에게 뒤집어 씌우고 스스로는 여유롭게 떠나간다. 악인의 돈은 일류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우연히 암살자를 만나게 된 소년에게 주고 돈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고 일러주면서.

이 책에는 여러 비정상적인 인물이 나온다. 경찰관이면서 그 지위를 이용해 범법을 저지르는 짐 도와 백과사전을 판다는 명목하게 지독한 돼지우리에서 마약을 제조해 파는 갬블러, 그의 상사(?)이자 이상한 성적 취향을 가진 비비. 그의 비서인 데지레는 나중에는 멜포드 편으로 돌아서지만 어려서 분리수술 중 죽은 샴쌍둥이 동생이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병을 지니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 이혼을 당하고 헤어진 아이들을 위해 백과사전을 사고싶어하다 죽음을 당한 캐런은 오히려 정상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멜포드가 '도덕적 암살'을 한 이유가 정말 아주 도덕적이길 바랐으나, 막판에 밝혀진 이유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그 정도로 살인을 할 생각이라면 짐 도를 먼저 쓰러뜨렸으면 좋았을 걸 말이다.

작가 소개에도 나와 있듯 데이비드 리스는 엄격한 채식주의자란다. 때문에 멜포드의 입을 통해 육식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한참 떠들어대고 있다. 아마도 그가 묘사한 동물들의 모습을 직접 보았다면 나도 절로 채식주의자가 되었겠지만, 아직은 그저 먼곳의 이야기로만 느껴진다.
아무튼 이 책에서 데이비드 리스는 '육식의 금지'와 '도덕적 암살'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따져보면 멜포드가 '도덕적 암살자'가 된 것이 '육식의 금지' 때문이므로 연결되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왠지 주제가 한가지로 통일되지 않아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헷갈린다. 워낙 채식을 강조해서 진짜 주제는 '육식 금지'인데 어감상 '도덕적 암살자'라는 제목을 붙인게 아닌가 하는 의혹도 든다.

다음번에는 초기(?) 그의 소설로 돌아와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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