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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취미/독후감

다시 본 <삼총사>

by 와룡 2008. 11. 10.

어렸을 때 가장 좋아하던 책이 <삼총사>다. 어린이 명작이랄까, 하여간 어린이 용이긴 하지만 나름 양장에 새끼손가락 마디 정도의 두께를 자랑하던 책을 늘 들고다니면서 몇 번이고 읽곤 했다. 그러고보니 영웅담을 좋아하게 된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 '어린이 용' <삼총사>에는 당시 프랑스의 자세한 정치적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아니,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내 지적 수준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지도. 다행히 만화에서나 나오는 '남장 여자 아라미스'라던가 '콘스탕스와 달타냥의 해피엔딩' 따위는 없는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내용이었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 <삼총사>가 그리워서, 원본 <삼총사>를 읽고 싶어졌다. 명작이니 만큼 여러 출판사에서 나온 여러책들이 있던데, 개중에서 어린이용/청소년용을 제외하고 완역본을 찾아 읽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예전과 똑같지만 원전 속에는 여러가지 숨은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일단 프랑스와 영국의 정치상황이며, 삼총사들의 숨겨진 과거, 혹은 미래가 눈에 띈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영화에서 심각한 악당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어렸을 때에도 '공정무사'한 멋진 사나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악당은 밀라디이지, 마지막에 달타냥을 총사부대장으로 승진시켜주는데다, 밤길에서 만난 삼총사를 꼼짝 못하게 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리슐리외는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튼 리슐리외라는 인물은 실제로는 유능한 정치가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루이 13세의 어머니인 마리 드 메디시스의 총신이었는데 두 사람의 권력싸움이 터지면서 실각했으나 다시 루이 13세의 총애를 얻었고, 이어 어머니와 아들의 화해를 주선하기도 했다. 최고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 왕의 총사대와 맞먹는,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할지도 모를 근위대(비밀경찰)를 끌고 다니며, 정적들에 의해 암살 위협까지 받았던 그 모습이 어딘지 조조를 연상시킨다.

아토스, 포르토스, 아라미스라는 삼총사의 이름이 너무 운율이 잘 맞다고 생각했지만, 가명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안느 도트리슈

아토스
는 라 페르 백작이라는 귀족으로(그래서 총사대 부대장 자리는 자신의 지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변명으로 달타냥의 청을 거절한다) 젊은 시절 아름다운 밀라디에게 반해 결혼을 강행했다가 그녀의 어깨에서 백합꽃 낙인을 보고 나무에 매달아 죽인 후 이름을 숨기고 총사대에 들어왔다. 아토스라는 인물을 가장 좋아했는데, 초반에 달타냥이 '계략' 적 측면에서 너무 활약하는 바람에 안타까웠다. 다행히 뒤로 갈수록 아토스의 진가가 드러난다. 추기경을 따돌리고 밀레디를 협박한 것이나 라로셀 요새에서의 아침식사, 밀레디의 처형 등이 모두 그가 꾸민 것이다.
하지만 사랑했던 여자를 단지 죄인이라는 이유로 매몰차게 죽였다는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그 여자가 실제로는 더없이 악독한 짓을 벌이고 있으니 결과론적으로는 죽이는 게 옳을 수도 있지만, 당시 그 상황에서는 그녀가 그에게 잘못을 저지른 적도 없고(그야 나중에 남편을 죽이고 재산을 독차지할 생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명확하지 않은 상황인데 말이다.

포르토스의 본명은 발롱(<뒤마클럽>에 따르면 이삭 드 포르토)으로써, 허풍쟁이인 것만은 틀림없다. 앞부분만 화려한 가죽멜빵이나 늙은 고소인(?)의 마누라를 공작부인이라고 말하는 것에서 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의 마누라로부터 돈을 받아 몸을 치장하고 그녀의 남편이 죽은 후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그 돈을 가져야겠다며 그녀와 결혼한다.

아라미스는 본명은 모르겠지만(<뒤마클럽>에 따르면 앙리 드 아라미츠라는 세속승려라고함)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연인의 정체이다. 왕비 안느 도트리슈의 절친한 친구이자 리슐리외의 미움을 받아 추방된 슈브뢰즈 공작 부인이 그녀다. 콘스탕스의 일로 여러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마리 미숑'이라고 자칭하는 그녀의 본명은 마리 드 모앙 몽바종으로, 본디 루이13세의 재상이었던 뤼네 공작의 부인이었다가 뤼네 공작이 죽자 슈브뢰즈 공작과 재혼하였는데, 역시 그 남편이 죽은 후 아라미스와 연인 관계가 된 모양이다.

애니메이션 삼총사


버킹엄 공작은 왕비를 사랑하는 의리있고 멋진 남성상으로 주로 묘사되지만, 원작에는 멋부리기 좋아하고 여성 편력이 심한 사람으로 나온다. 더군다나 <셰익스피어는 없다>에 보면 역사가가 그를 '하찮은 총신'이라고까지 표현할 정도의 부도덕(?)한 권신이었다. 프랑스 왕비 안느 도트리슈는 당시 유럽에서 제일가는 미녀였고, 여성 편력이 심한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는 그녀를 유혹하기로 결심한다. 쉽게 넘어오지 않는 여자가 더 매력적이었던지 마침내 그는 그녀를 '사랑'하기에 이르고, 아마도 안느 왕비 역시 동성애자에 소심한 남편보다 그에게 애정을 느꼈을 것이다.
버킹엄 공작은 라 로셀에 증원군을 보내기 직전, 밀라디에게 속아넘어간 해군 장교 펠튼 중위의 손에 죽는 순간까지 왕비의 '사랑한다'는 말을 기다렸고 그녀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만 생각했다. 그래도 자신을 찌른 피묻은 칼까지 보낸다는 것은 조금 심한듯.
청교도를 싫어하고 여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청교도인 펠튼이 그가 자신을 '강간'하였다는 밀레디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간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초반에는 소설이라기 보다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식의 전개에다 대화가 적고 작가가 불쑥 튀어나와 몇마디 중얼거리고 나가는 둥 몰입하기 힘들게 했지만, 뒤로 갈수록 소설다워져서 금세 읽을 수 있었다. 특히 하이라이트인 밀라디의 버킹엄 공작 암살 사주 및 콘스탕스 암살, 그리고 밀라디 처형 장면이 흥미로웠다. 삼총사가 밀라디의 계획을 알고 미리 대비하라고 윈터 경과 안느 왕비를 통해 이중으로 경고하였음에도 죽은 버킹엄 공작이 안타깝다.
나중에 연인(?)을 잃은 안느 왕비의 아들은 태양왕 루이 14세가 되는데, 루이 13세의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고 한다(설마 버킹엄의 아들?) 리슐리외가 왕권 강화에 힘쓴 재상이었으며 그 뒤를 이은 마자랭 역시 그의 노선을 따라 루이 14세에 이르러 절대 왕정을 열었다고 볼 수 있으니 사실 삼총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은 리슐리외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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