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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취미/독후감

황금마차는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

by 와룡 2009. 2. 10.

이집트의 여류 작가가 쓴 소설이다. 최근에는 영미소설 외에도 각국의 소설들이 국내에 번역, 소개되고 있어 이집트라고 해서 아주 색다르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또한 문화적 차이가 크게 느껴지지 않는 내용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의 이름이 생소하다는 것을 빼면 이집트 소설이냐 영미 소설이냐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다.

터키작가 오르한 파묵의 경우는 시대적,지리적 배경을 중심으로 소설을 써나가기 때문에 왠지 어렵고 생소하게 느껴지는 반면, 그녀, ㅌㅌㅌ의 소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어딘지 매우 익숙한 느낌이다.

어쩌면 그 '익숙함'이란 아멜리 노통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살인죄로 감옥에 갇힌 주인공 아지자는 '상상력 뛰어난' 아멜리노통식 여주인공을 떠올리게 한다. 상식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특별한 - 어쩌면 정신병적이라고까지 느끼게 되는 - 성격을 가진 여주인공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래도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기까지에는 우리가 동정할 만한 어떤 원인이 있었다, 라고 하는 줄거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멜리 노통의 다작에 점점 지루해져가는 독자라면 이집트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을 한번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소녀 아지자는 양아버지를 사랑했다. 그것이 어머니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요, 사회적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한 일임에도 그녀는 소녀다운 순정을 지키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양아버지는 그렇지 못했다. 아내가 죽은 후 다 자란 딸과 단둘이 산다는 것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하는 고민도 있었겠지만 본래가 정이 많은 그인지라 또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이번 그의 사랑의 대상은 아지자가 황금마차에 태우려고 하는 이집트의 여인상과는 완전히 다른, 자신이 원하는대로 행동할 줄 아는 자유로운 '해방 여성'이었다. 그래서 더욱 질투를 느낀걸까, 순정을 지키고픈 아지자는 결국 양아버지를 살해하고 감옥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감옥에서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사회 시스템 때문에 고통을 받은 여자들을 만나고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다.

황금마차는 그런 이집트의 가엾은 여자들을 보다 나은 세계로 데려가는 다리다. 아지자는 수감된 많은 여죄수들 중에서 구원할 사람들을 선별하여 마침내 황금마차를 출발시켰지만 결국 그 시도는 마차를 타지 못한 수많은 다른 여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이끌려 좌절되고 만다.
그리하여 황금마차는 하늘로 오르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런 '보다 나은 세계'는 없으며 설사 있더라도 시대적 환경이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아지자가 황금마차에 태울 사람들을 하나씩 골라내면서 독자는 수감된 여죄수들의 억울하거나, 혹은 동정할만한 이야기를 읽게된다. 사회적 약자인 여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희생하다가 누군가를 대신해, 혹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감옥에 들어오게 된 여자들이 하나 하나 눈앞에 그려진다. 두세명쯤 되면 어디에든 부조리에 희생된 사람들이 있구나 하면서 슬퍼하다가 대여섯이 되면서 저들은 왜 하필 저렇게 살고 있을까 하고 화가 난다. 그러다 열명이 넘어가면서 '대체 뭘 어쩌자는 거야'며 짜증이 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여자들을 열명 내로 줄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황금마차에 탈 열 다섯 명의 이야기가 '완전히' 독특한 것도 아니요, 결국 비슷비슷한 상황이니만큼 읽다보면 점점 누가 누군지 모르겠고 똑같은 이야기에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아마 작가는 이렇게 '반복적'으로 이야기함으로써 여자들이 누구나 이런 상황에 처해질 수 있다고 강조하려는 모양이지만 그게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 일고 여덟명만 되었더라도 그들의 상황을 이해하고 아지자의 상상에 감동했을텐데. 황금마차가 날아오르기도 전에 나는 이미 지쳐버렸다.

하지만 그들이 겪는 이야기는 우리네 일상과도 다를 바가 없다. 지금이야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도 아직 여자는 약자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생소하지 않게 느껴지는 또 다른 이유도 아마 그것 때문이리라.
물론 나는 이런 '현실적'이고 '비관적'인 결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왕 상상을 시작했으니 누구에겐가 희망을 주는 결말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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