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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미디어/영화와 드라마

뒤늦은 <천추태후> 감상

by 와룡 2011. 2. 11.


재작년 본방송 중일 때, 초반 경종과 황보수의 이야기가 재미있어서 보다가, 카리스마 경종이 죽은 후부터 흥미를 못 느끼고 잊어버린 드라마다. 우연히 재방송을 보다가 경종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다시 보기 시작했는데, 총 78회라는 어머어마한 장편이었다.

늘 조선시대 사극만 보다가 몇 년 전부터 조선 보다 오래된 이야기를 드라마에서 접할 수 있긴 했지만, 실은 너무 판타지스러워서 썩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천추태후>는 고려를 배경으로 한 얼마 안되는 사극 중 하나에다 역사적 사실을 잘 살리겠다 입장을 밝힌 정통 사극이기도 하다.
실제로는 여러가지 픽션이 추가되었지만, 처음 접해본 초기 고려의 이야기가 무척 흥미로웠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만 배우고, '귀주대첩 강감찬, 서희 거란족'이라는 <역사는 흐른다>의 노래 구절에서 접해본 게 다였던, 고려-거란 전쟁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난 한국사보다 중국사를 더 좋아하고, 또 송나라를 배경으로 한 무협 소설도 많기 때문에 송과 요의 싸움은 좀 알고 있었지만, 그 당시 고려는 뭘 하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아니, 시대적 배경이 고려였단 것조차 알지 못했다.

<천추태후>는 초기 고려의 정쟁과 거란 항쟁에 대한 이야기인데, 아무래도 주인공이 역사상 그 중심인물도 아니요, 승자도 아니라서 결말이 비극적일 수밖에 없다. 회를 거듭할 수록 저 인물이 정말 그 때 뭘 했을까 궁금해서 많이 찾아봤기에 비극이 될 거란 것은 예감했지만, 천추태후가 실각하고 강조가 난을 일으키는 부분부터는 안타까워서 보기 힘들었다.

나이 일흔에 귀주에서 거란군을 물리친 강감찬


천추태후가 아들을 황제로 옹립하면서 기세 상승 중일 때, 훗날 거란과의 전쟁에서 일익을 담당할 무장들이 속속 등장하기 때문에 마치 롤플레잉 게임을 즐기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에는 그 대부분이 죽음을 맞아, 초창기부터 활약한 사람 중 살아남은 것은 강감찬 뿐이다. 그 외에 다소 미미한 역할의 무신들 중에는 거란 1차 침입 때 안융진을 지켜낸 유방, 최질, 김훈 그리고 현종을 호송한 지채문이 최후까지 남았다.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지만, 최질, 김훈 등은 후에 무신 영업전을 둘러싼 대립으로 난을 일으켰다가 현종이 밀명을 받은 사람들 손에 숙청된다고 한다.
최종회에 짧게나마 귀주대첩 장면이 나오긴 한다. 우리 나라 역사 상 삼대 대첩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싸움이고, 그 후로 거란이 다시는 고려를 침공하지 못했다고 하니 의미가 크다. 하지만 거란의 침입은 회를 거듭할 수록 군사 수가 줄어들어 마지막 3차 침입에선 10만 밖에 되지 않았다. 반면 귀주의 고려군은 20만이었다고 한다. 8년 전만해도 개경을 함락당해 황제가 몽진을 갔던 고려가 어떻게 그 짧은 시간 안에 20만이라는 대군을 만들었을까?

중국에서 활약한 북방민족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거란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북방 느낌이 강하면서도 몽고처럼 거칠지 않고, 여진 처럼 깐죽거리는 느낌이 없어서 좋다. 여진의 한 갈래인 만주족은 일단 그 복색부터가 내 취향이 아니다.
<천추태후>에 나온 거란족은 북방민족 느낌을 살리려고 노력을 한 것 같은데, 가끔 성종의 꾸밈새를 보면 거란 보다는 페르시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 그것과는 무관하게 성인이 된 성종은 지난날 고려 경종 못지 않은 카리스마를 보여주긴 했다. 호전적인 성격이라 휘하에 많은 무장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그들 역시 후반부로 가면서 고려 명장들에게 한 명씩 죽음을 당했다.

앞서 말했듯 약간의 픽션이 가미되었는데, 그 중 가장 큰 부분이 천추태후의 전쟁에서의 활약과 강조의 역할일 것이다. 역사 상 강조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를 물리치기 위해 난을 일으켜 현종을 옹립하고 목종을 시해한 인물이다.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천추태후의 둘도 없는 심복으로 등장하고, 목종을 시해했다는 누명을 쓴다. 최종회에서 천추태후가,
어쩌면 역사는 그대를 역적으로 기록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 역시 그대 곁에 있겠다

고 독백하는데, 그것은 드라마에서 강조를 충신으로 그려놓은 데 대한 변명일 것이다.

제 1고수 강조


제 2고수 양규


제 3고수(?), 김숙흥

목종 시해만 빼면, 강조에게 특별히 나쁜 점은 없어 보인다. 거란과의 싸움에서도 검차를 도입하여 잘 싸우다가 교만해져서 패배한 것으로 되어 있고, 성종의 끈질긴 회유에도 불구하고 고려인으로 죽어가는 길을 택했으니까.
강조가 죽은 후, 그 뒤를 잇는 고려 무신 중 제 2의 고수 양규만이라도 살길 바랐는데, 그 역시 거란과의 싸움에서 죽음을 맞았다. 난 강조보다 양규를 더 좋아해서, 저 장면에서 차라리 성종을 죽이고 역사를 뒤바꿔주었으면 했다. 양규 이후에 천추태후가 등용한 김숙흥도 그와 나란히 죽었다.

성종 암살을 시도하는 대도수 장군


활약을 기대한 인물 중에서 가장 역할이 적어서 안타까운 사람은 대도수다. 발해 왕실의 후손으로 고려에 항복해 무신이 되어, 안융진에서 거란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그런데 그 후 병부상서가 되고나서는 하는 일이 없다. 김치양의 난 때 황제를 호송하다가 화살 한 대 맞고 비틀거리더니, 결국 짐이 되어 천추태후가 붙잡히는데 일조하기까지 했다. 거란 2차 침입 때 탁사정과 약속하여 전투를 벌이다가, 탁사정의 배신으로 포로가 되어 거란에 끌려간 후에는, 강조와 함께 거란 성종을 암살하려다가 죽는다. 실제로는 포로가 된 후 그의 행방은 미상이라고 한다.

미남자 지채문

중반부에 현종(당시에는 대량원군)을 보호하는 역할로 등장한 지채문하공진도 매력적인 인물 중 하나다. 특히 활을 무기로 하는 지채문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얼마 안되는 무신 중 한 명이다. 나도 처음 봤을 때부터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사람 생각이란 다 비슷한지, <천추태후>를 보고 지채문을 연기한 배우의 팬이 되었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채문과 함께 등장한 하공진은 좀 더 남성적인 매력을 가진 무신이다. 거란 2차 침입시 화평을 청하는 사절이 되어 갔다는 걸 보면 무신인 것 같진 않지만. 아무튼간에 그 때 스스로 볼모가 되어 교섭을 성사시켰고, 자신은 요나라로 끌려갔다. 역사에 보면, 그는 계속 탈출을 시도하다가 결국 사형 후 간을 꺼내 먹히는 잔인한 형벌을 받았다는데, 드라마에서도 항복 권유를 물리치고 유충정과 함께 배신자 이현운, 안패를 독살한 후 사형 당한다.

이렇게들 하나 둘 죽다보니, 천추태후를 도와줄 사람이 마땅찮다. 그래서인지, 천추태후가 충주로 가다가 거란의 침공 소식을 듣고 전쟁에 참여하려 할 때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충주궁의 궁사로 있던 김종현이란 사람인데, 처음에는 그냥 '김 궁사'로 나왔는데도 적장을 마구 죽이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강조도 못 죽인 자들인데, 이름도 없는 사람에게 제 1고수를 자리를 물려줄 생각인가 싶었다. 나중에 그의 이름이 '김종현'으로 밝혀져(밝혀진다고 한 건, 드라마에서 초반 등장에는 이름을 쓰지 않다가 나중에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혹시 처음엔 무슨 캐릭터인지 정해지지 않았던 걸까?) 훗날 귀주대첩에서 활약할 인물이 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수긍은 갔다. 김종현과 함께 거란 적장 두 명을 죽여 날 놀라게 한 또 한 명의 장군은, 알고보니 강민첨이었단다. 역시 귀주대첩에서 활약할 사람이니 후반에 등장한 모양이다.

천추태후가 여자다보니 여 무사도 여럿 등장한다. 초반 황주 명복궁 궁사의 딸이었던 여교관 이설화가 그 시작인데, 사가문과 맺어질 것처럼 하더니 천추태후의 반란에서 어이없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 뒤를 이어 훗날 강조의 부인이 될 천향비와 김치양의 수하 사일라가 천추태후를 보호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난 둘 다 좋아해서,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정말 안타까워했다. 어차피 천향비는 죽어야 이야기가 되지만, 사일라 손에 죽지는 말라며 가슴졸이고 봤는데 다행이었다. 사일라가 천향비의 죽음을 계기로 김치양을 배신하길 바랐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무사 천향비


여무사 사일라


여무사들 중에 가장 강하고 독한 역할인 거란의 독연은 처음엔 강조에게 눈독을 들이다 결국 사가문과 눈이 맞아 조국을 떠났다. 김치양 일파가 몰락한 후 그녀는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아들인 황주소군을 데리고 동여진에 귀순한다.
동여진에는
'한 아이가 나타나 동굴의 맹수와 닷새를 보내고, 훗날 부족을 통일하고 대제국을 세운다'
는 전설이 있다며 황주소군을 곰이 있는 동굴로 들여보내기에 설마 저 애가 아골타가 되는 건가, 하면서 깜짝 놀랐다.
그래서 찾아보니, 후일 여진족을 통일해 금나라를 세우는 아골타의 조상이 고려인 금준이라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더구나 그가 신라의 마지막

황주소군이자 금 시조의 조상인 금준

태자인 마의태자 후손이라고도 하니, <천추태후>에서 김치양을 마의태자의 후손으로 등장시킨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보다. 결국 천추태후의 자손이 금나라를 세워 발해의 땅을 되찾는다는 그녀의 꿈을 이룰테니 그걸로 만족하는게 어떠냐, 이런 말인가.
다 자라서 어머니를 한 번 찾아온 황주소군은 차림새 때문인지, 멀리서 보면 아버지 김치양을 많이 닮았다.

천추태후가 정말로 북방 점령을 위해 무신을 편전에 참여시키고 군사력을 증강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훗날 거란의 2차 침입이 끝나고, 문신들이 관리의 녹봉 부족을 무신들의 영업전을 몰수하여 보충하는 방법을 제안할 정도로 당시 고려에는 무신이 문신에 비해 상대적으로 홀대받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천추태후>에서 강감찬과 최항을 빼면 대부분의 문신들이 제 재산과 목숨 유지하기 급급한 소인배들로 나오는 것도 천추태후가 무신들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초반에는 나름 탄탄한 줄거리를 이어갔지만, 뒤로 가면서 시간이 부족했던지 약간 억지스러운 데도 있었다. 오랫동안 활약하던 거란의 장군들이 최종회를 얼마 앞두고 별 싸움도 없이 죽어가고, 현종이 거란군 손에 거의 잡히려는 걸 때맞춰 천추태후가 나타나 구해주는 것도 좀 억지지 않았나 싶었다.
특히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예쁘고 착했던 연흥궁주가 남편이 병을 앓으면서부터 지독한 악귀가 되었다는 것이다. 후반부에 천추태후에 대적할 중심 인물이 마땅히 없어서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 같지만, 평생 사랑하던 남편과 아들처럼 키운 목종에게 약까지 먹여가며 뜻을 이루려고 악을 쓰는 모습이, 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 옥에 가두라 한 지난날의 모습과는 너무 어울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녀의 최후는 나오지도 않는다.

비록 현종이 천추태후와 함께 적전을 일구는 장면으로 고려에 찾아온 평화를 노래하며 끝을 맺었지만, 좀 더 시원스런 승리와 뜨거운 의리를 기대했던 나에겐 다소 실망스런 결말이었다. 문득 좀 제대로 된 영웅 이야기가 그리워진다. 청년의 피를 뜨겁게 만들 소봉(그러고보니 소봉도 거란인이었군, 내가 좋아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구나~)이나 소녀의 마음을 설레게 할 초류향 같은 인물은 더이상 드라마에서도, 소설에도 볼 수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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