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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취미/독후감

더글라스 케네디, <모멘트>

by 와룡 2012. 1. 18.

처음 읽은 책이 마음에 든 작가의 다음 작품이 여전히 마음에 들 확률은 얼마나 될까.
작가를 보고 작품을 선택하는 것은 장르 소설에서는 잘 통했는데, 어찌된 셈인지 최근 내가 좋아하게된 작가들은 두 번째, 세 번째 소설이 잘 읽히지 않았다.

파울로 코엘료, 아멜리 노통브, 기욤 뮈소...

그나마 최근 작품이 국내에 출판되지 않아서 손 놓게 된 데이비드 리스가 읽는 족족 재미있는 작품을 (내게) 선사한 오래만의 작가였다.

그리고 이제, 더글라스 케네디.

<빅 피쳐>를 재미있게 읽고 뒤이어 <위험한 관계>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의 세번째 작품에 손대기가 꺼려졌다. 기대는 하지 않으면서도, 어차피 볼 소설도 없으니 읽어보자는 심정으로 구입했다.

기대를 하지 않았다는 전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무튼 난 이 <모멘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앞서 읽은 두 작품보다 더.
슬프고 어둡고 어찌보면 다소 과장된 이야기  - 물론 더글라스 케네디의 전 작품도 그랬지만 - 지만, 그 속에 담긴, 실제로는 다를지 모르지만 건너 짐작하게 해 주는 이념 전쟁 중인 동족들의 이야기와, 운명적인 사랑도 한 순간의 오해로 끝날 수 있는, 믿음과 사랑의 자존심 문제를 깊이 느꼈다.

<모멘트>를 보고 새삼 독일도 한 때는 우리처럼 분단국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최근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임에도 무척이나 오래된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분단 독일.
<모멘트>에서 본 어두운 동독의 모습에서 북한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그려본다. 뭐, 내가 자유로운 나라에 살고 있다보니(물론 작가도 그러니만큼) 그들의 삶이 더욱 어두워보이는 것일테다. 이념적 문제를 저지르지만 않으면, 그 나라도 살기좋은 곳일지 모른다.

하지만 <모멘트>의 페트라는 그렇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주변 사람으로 인해 어쩌다 이념 문제에 휘말린 그녀는 사상죄로 투옥되었다가 이중스파이가 되어 서독으로 망명한다. 그곳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아봤으니 만족할만도 할 텐데, 동쪽에 두고 온 어린 아들 생각에 그녀는 결코 동독을 배신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운명적인 사랑이 찾아올 때까지는.

페트라는 운명적인 사랑을 위해 자신을 조종하던 동독 스파이를 죽여 자유를 찾으려 했지만, 그녀의 연인은 진짜 신분을 알고 변명조차 듣지 않은 채 그녀를 서독 정보국에 넘겼다. 다시 동독으로 끌려간 그녀는 훗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지만, 수감 생활에서 얻은 병 때문에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모멘트>의 주제는 명확하다. 우리는 행복한 순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순간을 즐기고 소중히해야 한다는 것.
사랑은 영원하지만 그 배신감은 일시적이고 충동적이다. 그 순간을 잘 넘긴다면 토마스도 '사랑'없는 결혼 생활과 예정된 이혼을 겪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입장을 바꾸어 내가 토마스였다해도 그 순간 페트라를 용서했을지 자신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다보면 늘 이런 사소한 배신감과 자존심 싸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때 일시적인 충동으로 그 사람과 나 사이를 영영 끊어놓는 일은, 일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별로 없다. 보통은 화와 오해를 풀 하루 이틀 정도의 시간이 주어지니까.
다만 페트라와 토마스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었을 뿐이다. 베를린 장벽이라는 이념의 상징이, 이념 뿐만 아니라 사랑마저 갈라놓았기 때문에.

이념 충돌이 소재가 되기는 했지만, 결국 <모멘트>가 말하는 것은 사랑하는 순간과 그 순간의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랑보다는 이념 문제에 좀 더 귀를 기울였다. 워낙 글을 잘 쓰는 작가이긴 하지만, 그 배경이 베를린이 아니고, 분단 독일이 아니었다면 좀 덜 재미있어했을지도 모르겠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에는 반드시 글을 쓰는 사람이 나온다. <빅 피쳐>와 <위험한 관계>에서는 주인공의 부인이나 남편이 작가를 꿈꾸고 있었다. 이번 <모멘트>에서는 아예 주인공이 작가다. 더글라스 케네디라는 사람이 얼마나 글 쓰기를 좋아하는지 알만한 부분이다.

세 작품을 재미있게 읽었으니 다음 작품도 절로 기대가 된다. 늘 우울한 이야기를 내놓았으니, 이번에는 좀 유쾌하고 밝은 이야기였으면 싶지만, 어쩌면 이것이 그의 색깔일지도 모른다. 유쾌하고 밝은 이야기는 다른 사람에게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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