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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소설/잡설

랑야방 번역 후기

by 와룡 2016. 7. 1.

랑야방 1권이 출간되었다.

이 시점에서 번역 후기를 한 번 써볼까 한다. 말은 번역 후기지만 잡설이 될 수도 있다. -_-;; (당연히 분류도 잡설 카테고리^^)

지인이 '그거 삼국지 같다더라'고 해서 기대를 품고, 나도 진중한 역사 픽션 하나 번역해볼까 하며 책을 펼쳤다.

'금릉, 대량의 수도' 

좋다. 마차가 느릿느릿 성문 앞에 서고 태부였던 옛 스승을 추억하는 주인공까지 진지하다.

그런데... 

몇 장 후 깨달았다. 이 책은 진중한 역사 픽션이 아니었다. 역사 픽션은 맞지만, '진중한'은 아닌 게다. 

그래서 싫었냐고? 아니, 결코!! 

유머 코드가 나랑 너무 잘 맞아서 보다가 얼마나 웃었는지 모르겠다. 무게감 있는 예스러운 문장에 대한 부담감보다 이 유머를 제대로 살려야 할텐데 라는 걱정이 앞섰다. 

그렇다고 웃기기만 한 것도 아니다. 구성 탄탄하고 스토리도 재미있다. 처음부터 그랬는지 개정하면서 정리했는지 모르지만, 한참 뒤에 연결될 떡밥들을 미리 미리 착착 던져주는데... 빠짐없이 먹혀들어간다. 

(고룡님도 떡밥 많이 날리는데 술 덜 마시고 쓸 때는 떡밥을 잘 줍지만 안 주을 때도 많다... 근데 해연은 정말 잘 줍는다...)

스포가 되지 않도록 간략한 예를 하나 던지자면, 1권에서 백리기와 싸우는 사람을 잘 봐두시라. 이렇게 해두면 어떻게 안 속겠어! 독자인 나도 속는데!

랑야방 등장인물들은 개성이 많다. 악역 조차 개성적이고 매력적이다. 번역을 할 때 이 개성들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가 첫번째 고민이었다. 책을 읽은 분들이 중화TV에서 방영한 드라마와 큰 차이를 느낀 인물 중 하나는 아마도 예황 군주가 아닐까 싶다.

난 예황 군주란 인물을 처음 봤을 때, 그 어떤 무협에서도 등장하지 않은 엄청난 여자라고 생각했다. 카리스마 있는 여자 캐릭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황 군주는 단순히 카리스마가 아니라 당당함이랄까, 자신감이랄까, - 적당한 표현을 못 찾겠다 - 아무튼 남자 못지 않은 위엄을 갖춘 여장군이다. 드라마에서도 귀족 여자들과는 다른 자신감 넘치는 표정이나 자세, 걸음걸이가 보인다. 

예황 군주의 말투를 하오체나 합쇼체로 쓴 이유다. 중화TV 방영분에는 해요체를 썼다는 건 알지만, 연기나 상황을 보면 내 눈에는 도저히 해요체는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매장소가 임수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부터는 ~해요체로 바뀐다. 어릴 때 함께 놀던 나이 많은(?) 약혼자이니까 계속 소원하게 굴 수는...)

월귀비의 정사요에 당할 뻔 하고도 황제에게 고발하는 마음가짐이나, 아우가 법을 어기고 용의자를 마구 때렸는데도 사과한번 하지 않는 꿋꿋함 같은 것만 봐도 얼마나 당당한 여자인지 느껴진다.

특히 매장소가 임수라는 것을 알아차린 후 한 말은! 

"미안해요. 다시는 오라버니를 떠나지 않을 거예요."

이 부분에서 완전 감동을 받고 (다시 읽어도 소름끼친다... 정말 멋진 여자!), 내가 드라마를 잘못 봤나 하고 다시 찾아 봤다. 드라마 대사는 "날 떠나지 말아요"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난 '당신이 고생할 때 옆에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이제부터는 내가 옆에 있겠다'는 말 한 마디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이 장면에 로맨스가 가미되면서 순간적으로 순정만화 여주인공 같은 대사를 하지만, 그녀의 이런 성격은 좀 더 뒤에, 매장소가 화한독에 걸린 것을 알았을 때 '10년이면 충분하다. 계속 옆에 있겠다'는 대사에서 대신 드러난다. 

아무튼 간에 예황 군주의 이런 당당함을 보면 후홍량이 왜 '예황에게는 영광'이라고 말했는지 알 수 있다. 


또 한 사람 개성을 살리고자 한 인물은 비류다.

비류는 지능이 낮아 말을 길게 하지 못한다. 가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간단하게 하는데, 거의 세 글자를 넘지 않는다. (몽지는 두 글자라고 하지만, 세 글자도 있던데??

그게 이 캐릭터의 매력인데, 한글로 옮기는데는 다소 늘어지는 부분이 있어서 가능한 짧게 쓰려고 손을 봤다. 그래서 물론 반말이다.  "슬퍼하지 마" 부분도 좀 더 줄일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번역과는 무관하게 원작 자체에서 인물의 개성을 살리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악역이라 볼 수 있는 황실 사람들 - 황후, 월 귀비, 예왕, 태자 - 은 '본(本)' OO라고 스스로를 지칭한다. 굳이 한글로 옮기자면 '본 궁 = 궁전의 주인인 나는', '본 왕 = 왕인 나는' 정도가 될 것이고, 이해하기 좋게 쓰려면 '나는', '이 사람은' 정도로 쓸 수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원문 그대로 썼다. 왜냐면 이대로 써야 이 캐릭터들이 자기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고 지위를 철저히 따지는 스타일임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냥 '나'라고 하면 그 차이를 알 수 없다. 정왕은 자신을 '본 왕'이라고 칭하지 않지만, 예왕은 자나깨나 '본 왕'이지 '나'라고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둘 다 똑같이 '나'라고 하면 개성이 줄어드는 것 같다.

본 왕은!

원작이 그렇다면 그 느낌을 살려주어야 할 것 같았다. 마침 우리 나라에는 이미 '본좌'라는 (잘못 쓰이고 있지만 그래도 의미는 확 와닿는다. 본좌!! 딱 들어도 대단한 사람같은 느낌) 단어가 어느 정도 알려져 있어서 크게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만약 이 소설을 보고 '본' 자의 의미를 확실하게 체감한 독자가 있다면, 다음에 중국 드라마 볼 때 '본 공자는=번 꽁즈' '본 낭자는=번 꾸냥' 이라고 자칭하는 대사가 귀에 쏙쏙 들어올 거다. (라고 믿고 싶다) 그 때 '아, 저 사람이 지금 자기를 높이고 있군'이라고 이해하면 성공이다 싶다.


개성 문제 말고도, 고민이 되는 부분은 있다. 나오기 전부터 말이 많았던 '소수'건.

(아무 생각없이 퍼왔는데 의미심장한 그림이다. 소수의 일등 공신은 소수점이라니!)

나도 중화TV에서 방영한 드라마를 봤고, '소수'를 '수야'로 번역한 걸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참 많이도 망설였다. 최종적으로 '소수'로 결정하는 바람에 마음에 안든다는 분들이 많더라. (수학을 잊지 말라는...)

'수야'도 정말 좋은 번역 맞다.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중화TV 번역은 정말 훌륭하다. 가능한 한국 정서에 들어맞게 옮기고, 기나긴 부연 설명 (일명 쓸고퀄??)을 압축하여 핵심만 꼭 집어 표현한 걸 보면 경험이 많으신 분인게 분명하다. 

왜 '소수'로 했는지를 따지기 시작하면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한 가지만 짚어본다.

태황태후가 아이들(?)을 불러놓고 이름 묻고 혼인했냐고 묻는 장면. 태황태후는 척 보고 임수를 알아본 유일한 인물이다. 그녀가 임수를 얼마나 아꼈는지는 원작을 보면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아무튼 이 자상한 할머니는 모든 아이들을 애칭으로 부른다. 이 아이들을 경예야, 필아, 비류야, 예진아, 수야라고 부르면 갑툭튀한 수야가 이상하다고 다들 생각했을 것이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뜬금없이 왜 수야래?' 할 거다. 수야가 임수의 애칭이라면 특히나 할머니가 '왜 임수를 찾지?' 라고 놀랄 게 뻔하다.

근데 아무도 안 놀랐다.

수야가 아니라 소수라고 불렀으니까... 할머니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소자를 붙여가며 아기처럼 부르니까, 처음 본 소철에게도 소자 붙여서 '소소야'라고 한 걸로 들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임수를 불렀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들은 매장소의 이름은 '소철'이니 만약 ~야라고 할 거라면 '철아'라고 불러야 아무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그나마 월귀비가 '어머 우리 할머니가 유명한 인재마저 애들처럼 부르시네?'하고 농담을 던지면서 '소소'라고 부른 것으로 오해했다고 알려준다(고마운 월 귀비. 미치지 마세요-_-;;). 월 귀비의 이 대사 덕분에 드라마 번역은 '맘대로 이름을 바꿔 부르시네요'라고 살짝 바꿔서, 갑툭튀인 '수야'를 그냥 할머니가 아무렇게나 지어낸 이름으로 생각했다는 식으로 이해를 시켜준다.

근데 특히 책에는 부르기만 하고 아무런 언급이 없다. 정말 누가 한 마디만 해줬으면 좋았을텐데, 그냥 넘어간다(-_-). 가제본을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답답하고 아쉬운 나머지 여기다 왜 아무도 놀라지 않고 지나갔는지에 대한 주석까지 달았었다. 하지만 정식 출간본에서는 삭제했다. 아무래도 독자의 책 해석에 역자가 과하게 끼어드는 것 같아서... 

어쨌거나 이 장면 때문에 소수를 수야로 옮기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외에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럼 샤오슈라고 하라는 분도 있는데, 솔직히 샤오슈로 하면 모든 게 해결된다. (샤오슈야라고 하라는 사람은 없을테니) 하지만 샤오슈로 바꾸려면 모든 인물을 중국어 발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우리나라 외래어표기법에는 '중국 인명은 고대인은 한자음으로, 현대인은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하라는 원칙이 있다.  

솔직히 랑야방의 시대 배경은 미상이지만, 독자들도 나도 이게 현대물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물론 외래어표기법을 안 지키면 출판이 안된다던가 하는 건 아니지만, 정식 출판물에서 표기법을 지키는 것은 관례이기 때문에 (그래서 해연이 하이옌이 되고 후홍량이 허우홍량으로^^) 고유명사를 한자 독음으로 썼다. 만에 하나 중국어 발음으로 쓰기로 했다 해도, 오히려 더 많은 인물들이 낯설게 느껴졌을 것이다. (니황, 꽁위, 린천...)  아마도 위장자는 시대배경상 현대인 이름 표기법을 따라, 독자들이 원하는대로 중국어 발음으로 나갈 수도 있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번역하시는 분과 출판사에서 결정할 문제라서. (밍타이 아청 vs 명대 아성 무엇일까 나도 궁금)

'수야'보다 '샤오슈'가 더 좋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내가 왜 '소수'를 '수야'로 옮기지 않았는지를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샤오슈'가 '소수'이기 때문이다. 발음이 다를 뿐이지. (물론 발음이 달라서 싫다는 그 맘은 백번 알겠다-_-) 소수를 수야로 바꿔달라는 건 샤오슈를 슈야로 바꿔달라는 말이다. 중국의 '小'자 애칭, '兒'자 애칭, '阿'자 애칭, 그리고 쌍음 애칭(링링, 쌍쌍 같은 거)... 이런 건 그냥 고유명사로 받아들여주었으면 좋겠다. 엘리자베스의 애칭이 베스라고 해서 베스를 '엘리자베스야'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물론 이건 내 생각이지 모든 중문 번역가분들/언어학자 분들의 생각은 아니다. 다른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분명 있을 거다.)

물론 무슨 말을 해도 싫은 건 싫은 거겠지...


암튼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랑야방> 원작 소설은 가능한 중국적 요소를 살리는 쪽으로 번역했다는 것이다.

중화TV 번역은 누구나 보는 매체답게 가능한 많은 사람이 쉽게 이해하고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옮기는 것으로 보였다. 중국의 문화적 특징을 한국 문화적 특징으로 반영하려고 노력 많이 한 것을 알 수 있다. 번역가 분의 능력과 노력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에 중국적인 요소나 상세한 내용들이 사라졌지만, 짧은 자막에서는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은 다르다. 책에서는 그런 상세한 내용들을 살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백리기가 외공의 고수(몸을 튼튼하게 해서 웬만한 힘으로는 맞아도 타격을 받지 않는 무공을 익힌 사람)라는 내용은, 어차피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다른 말로 대체할 수 있으므로 드라마에서는 반드시 번역하지 않아도 되지만, 소설에서는 일부러 옮겨 놓았다. (랑야방 알고 보면 무협요소 무지 많다)

드라마에는 정왕이 태자가 된 후 정비가 아들에게 높임말을 쓰는 장면도 있는데 이 부분도 우리나라 사극 스타일을 따라갔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부모라고 해도 높은 자리에 오른 자식에게 높임말을 하는 한국 문화에 익숙해있어서 이쪽을 더 친숙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하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아서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나도 고대 중국에 가보지 않아서 모르겠고... 일단 드라마는 그렇다-_-) 나는 중국적 요소를 살리려고 한다.

물론 너무나 낯설고 이상한 부분까지 옮기지는 않을 것이고, 가능한 드라마 분위기를 많이 따를 거다. (안 따랐으면 녕국후는 영국후가 되고, 랑야방은 낭야방이 되었을 것이다...)


* 이야기가 길어져 깜빡하고 할 말을 못해서 덧붙입니다. 가능한 잘 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100% 완벽할 수 없고 또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으니 잘못된 부분이나 고쳐야 할 부분은 제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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