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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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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독후감

폭풍의 밤 - 세익스피어의 유언장에 얽힌 이야기

by 와룡 2009. 3. 2.

한 때, 누군가가 꿈이 뭐냐고 물으면 "세익스피어 같은 훌륭한 극작가"라고 대답하던 때가 있었다.
그만큼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좋아했지만, 극본 형태로 본 것은 거의 없는데다 그것도 지금에 와서는 모두 잊어버렸다. 덕분에 이 책을 읽으며 세익스피어의 작품이야기가 나올때마다 당황스럽기만 했다.

물론 이 소설이 세익스피어의 작품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다. 영국의 자랑거리 세익스피어가 수많은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후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대부분의 재산을 큰딸 수재너에게 남긴다는 유언장이 공개되면서부터 사람들은 왜 그가 죽으면서까지 아내와 둘째 딸을 무시한 것일까 궁금해하기 시작한다.

세익스피어의 작품 이야기는 그의 친구라는 한 늙은 연극배우가 수재너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해 주면서 하나씩 모습을 드러낸다. 파란 옷을 입은 배우는 비록 아버지이지만 한번도 집안일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던 데 대한 서운함(?)으로 그 작품을 전혀 읽지 않았던 딸 수재너에게 이야기와 연기를 곁들여 세익스피어의 일생을 이야기해준다.
소설의 대부분이 이 '파란 옷 입은 배우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다소 지루한 면이 있다. '유언장의 비밀'이라고 해서 긴박감 넘치는 이야기와 무시무시한 반전을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실망할 것이다. 하지만 세익스피어의 존재마저 의심을 받고 있는 요즘,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인간적인 그의 삶, 일반인과 다름없는 고민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릴 적 우상이요, 신격화되었던,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던 '작가' 세익스피어가 어느 시대에 우리처럼 살고 간 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세익스피어의 유언장을 보고서, 그의 마지막 말과 그간의 작품들에 깔린 이야기를 너무도 잘 짜맞추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전혀 억지스럽지 않은 전개다.
부인 앤과의 사랑 이야기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써내고, 부인의 외도에 의한 고뇌를 <오셀로>로 써내고, 사랑하는 딸을 그리며 <폭풍우>를 써냈다는 것은, 단순히 그가 천재여서, 상상만으로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하는 것보다는 훨씬 현실적이다.
하지만 말했듯이 작가의 '추측'이기 때문에, 앤이 정말로 세익스피어의 경제적 원조를 홀로 탕진(?)하고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을 세익스피어의 자식이라고 우겼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한 앤 자신의 '변명'은 소설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약간 개운치 않기는 하지만 끝이 좋으면 다 좋다고, 수재너는 아버지의 마지막 작품인 <폭풍우>를 읽고 자신을 향한 사랑을 느끼면서 오해를 푼다.

사실 이 책을 아주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다.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라던가 그 속에 숨은 세익스피어의 삶은 꽤 흥미로운 소재임에도 '유언장의 비밀'을 푸는 것을 단순히 이야기로 전개했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런 방법밖에는 없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는 꽤 구성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처럼 세익스피어를 좋아하면서도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사람이라면 다시 그의 작품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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