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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취미/독후감

흑산(黑山)

by 와룡 2011. 12. 12.

생각해보니, 난 소설을 좋아하지만, 고등학생 후로 한국 소설은 별로 읽은 게 없다. 특별히 취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다지 끌리는 책이 없어서다.

내가 고르는 책은 일단 표지가 예뻐야 하고,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고르다보니 실패한 책도 많지만, 가끔은 숨겨진 좋은 책도 고르곤 한다.

그런 기준으로 볼 때, <흑산>은 정말 내 취향이 아닌 표지요, 제목이다(다행히 저 책 겉표지를 벗기면, 저것보다는 예쁜 겉장이 나온다). 그런데도 굳이 사 읽은 것은, 한국 소설에 손이 잘 가지는 않아도 김훈 님 작품에는 나름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흑산>은 어두운 겉표지와 비슷하게 어두운 소설이다.
작가가 굳이 어둡게 쓰려고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소재가 소재다보니 어두울 수밖에 없다. 조선 시대, 유교를 버리고 천주교를 믿기 시작한 선비, 그리고 어린 백성들이 어떻게 탄압을 받는지 상세히도 묘사되어 있다. 나는 천주교 신자는 아니지만, 전통 - 그것이 어디서부터 이어진 전통인지는 모르겠지만 - 을 거부하였다고 참혹한 박해를 당한 그들을 떠올리면 함께 마음이 아프다.
마노리가 무사히 황사영에게 오지 못하고 체포되었을 때 나도 더없이 아쉬워했다. 황사영이 그저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마노리를 이용했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도, 마노리가 형틀에 묶인 순간 스스로가 천주교도임을 알았다는 것에 감동하고 또 슬퍼했다.

사극을 즐겨보지만, 사극이든 역사 소설이든 기본적으로는 역사적 인물에 중심을 둔다. 그 속에서 나는 훌륭한 왕, 훌륭한 정승, 민중을 대표하는 의적 등의 입에서 힘든 백성의 삶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한 다리 건너서 듣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저 힘들었겠거니, 하고 생각하던 조선 시대 백성의 힘든 삶을, 이 <흑산>에서 절절이 느낄 수 있다. 주리를 틀고 압슬을 가하는 무시무시한 형벌도, 사극보다 잔혹하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한숨이 나온다. 그 시대에 일반 백성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아니, 어쩌면 전생에 나도 그런 삶을 겪었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다행인 것일지도.

힘든 민초들은 사후의 행복을 바랄 수밖에 없어서, 혹은 힘들 때 누군가 의지하고픈 마음에 천주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천주가 그들에게 힘을 주지는 못했다. 끝내 황사영은 외국의 군대로 조선의 천주교 박해를 막아야 한다는 '백서'를 쓰다가 발각되어 참형을 당했다.

<흑산>에 주인공은 없다. 정약전도 주인공이 아니고, 황사영도 주인공이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집중된 이야기보다는 이름 없는 무명 백성들 한 명 한 명의 삶을, 무겁지도 않고 질리지도 않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그들이 왜 천주교에 빠졌고, 왜 목숨까지 버려가며 그것을 믿어야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들의 눈물어린 순교를 찬미하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그것이 중요하지도 않다.

사실 나는 <흑산>에서 작가가 하고자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마노리, 박한녀, 아리, 강사녀, 육손이... 그들의 삶이 마음이 아플 뿐이다.
슬픈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아서, 게다가 답답한 결말도 싫어서 아마 두 번 펼쳐보지는 않겠지만, 사극 뒤편에서 숨겨진 현실적인 이야기를 새삼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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