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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소설/잡설

<천재소독비> 소설책, 방대한 이야기의 시작

by 와룡 2019. 5. 29.

드라마 <운석전>의 원작 소설인 <천재소독비>가 드디어 종이책으로 출간되었다. 물론 아직 전반부인 다섯 권 밖에 되지 않지만...

몇 년 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드라마 <후궁견환전> 원작 소설이 그 어마어마한 분량 때문에 출간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국내에서 중국 콘텐츠의 인기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큰 사건이기에 글 몇 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자축에 가깝다.) 오래전 '그래도 영미권 콘텐츠는 번역할 거라도 많지, 중국 건...'하고 아쉬워하던 글이 아직 이 블로그에 남아 있는데 정말이지 격세지감을 느낀다. 뭐, 인생의 길이를 보면 그렇게 오래된 것도 아니지만 앞을 내다보는 눈 하나 없는 나는 그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기대조차 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예전 무협 소설 중에는 꽤 긴 작품이 있었다. 김용님의 대표작 <녹정기>는 국내에 12권으로 나온 적이 있고, 우리나라 무협 소설의 대표작 <군림천하>, <묵향>은 30권이 넘었는데 아직 완결도 안 났다.

하지만! (이거 딱 지에모 작가 문체!)

이미 오래전 이야기이고, 최근에는 그렇게 기나긴 장편(무협 소설이건 문학 소설이건)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요즈음 인기 있는 장편이라면 <왕좌의 게임> 원작 소설인 <얼음과 불의 노래> 정도인 것 같은데, 이것도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드라마 방영 이후이고, 그전에는 출판사에서 크게 적자를 보았다고 한다(출처). 그런 마당에 영미권 콘텐츠도 아니요, 국내에서 드라마가 대성공한 것도 아닌 <천재소독비>가 출간되다니, 중국 장르 소설을 즐기는 사람들도 뜻밖이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런 유의 가벼운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참 놀라운 게, 이야기가 재미있으니 별로 좋아하지 않던 스타일이라 해도 전혀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천재소독비> 검토를 요청받은 다음 첫 장을 딱 펼쳤는데...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나처럼 본래는 '그닥'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조차 쑥 빨려 들 정도면 정말 재미있는 작품이라고 확신했다! 문제는 분량. 검토 의견 마지막에 '내용은 재미있으나 분량이 마음에 걸림. 하지만 책이 나오든 말든 나는 끝까지 다 보겠음'이라고 썼다. (물론 아주 예의 바른 말투로)
그런 다음 대략 800장 까지 읽었을 때쯤, 출간 결정이 났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작품을 붙잡고 있다.

이 작품의 분량은, 중국 원서로 약 430만 자다. <녹정기>가 약 120만 자, <후궁견환전>이 약 150만 자이니 얼마나 어마어마한지 감이 올 것이다. 요즘 중국 장르 소설은 장편으로 가는 추세인가 보다. 제법 유명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초 장편이 꽤 있다. 물론 <천재소독비> 만큼은 아니지만 <장야>는 약 370만 자이고, <지부지부응시녹비홍수><황권>, <경여년>은 모두 100만 자가 넘는다. 놀라운 건, <장야> 외 나머지 세 작품은 벌써 국내 출간되기로 했다는 것! (종이책인지는 모르겠다. 종이책으로 나오면 10권은 되겠지) 물론 셋 다 <후궁견환전> 정도 분량은 아니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저 정도 분량이면 난색을 표하던 국내 출판사들이 이제는 100만 자 가량의 작품을 들여올 자신이 생겼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 <후궁견환전> 드라마가 지금쯤 나왔더라면 아마 원작 소설도 출간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후속작 <후궁여의전>은 국내 방영 예정이 없는 데다 드라마건 소설이건 전작에 못 미쳐서 지금 시점에 잘 될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출판 전문가가 아니니까 사실은 아주 잘 될지도!)

뒤늦게 생각났는데, 연재하는 작품 중에서는 <범인수선전> (국내에 <학사신공>으로 번역)이 <천재소독비>를 능가한다. 찾아보니 약 740만자이고 2부인 '선계편'은 현재까지 약 280만자다.

다시 <천재소독비>로 돌아가자.

여기서부터 스포일러가 나올 수 있다.

처음 이 작품을 봤을 때는 '독'을 소재로 한, 능력 여주의 로맨스라고 생각했다. 사실 앞부분은 그에 가깝다. 그런데 뒤로 갈수록 세계관이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단순히 로맨스라고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정도면 대서사시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앞부분도 사건이 다소 아기자기한 면은 있지만, 꼼꼼히 따져보면 전혀 중복되는 내용이 없고 느슨하게 풀어지는 부분도 없다. 작가의 머릿속에는 대체 뭐가 있기에 이렇게 끊임없이 사건이 쏟아지는지! 절로 감탄이 나온다.
비슷한 작품으로 <의비권경천하>를 읽었는데, 여긴 우연한 혹은 유사한 사건이 좀 있는 편이다. (하지만 난 이 작품도 눈물까지 흘려가며 재미있게 봤다) 정치/전쟁을 다룬 <일대군사>도 띄엄띄엄 읽고 있는데, 잘 썼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건을 실제 역사에서 가져와서 신선함이 떨어진다. (삼국지, 초한지 등등을 섞어놓았다 보면 된다) 그에 비하면 <천재소독비>는...

정리 삼아 그려본 등장인물 분류도인데, 다 그린 게 아닌데도 이 정도다. 이 얼마나 방대한가.

주인공 한운석이 초반에 만나는 사람들은 운공대륙 천녕국 황실과 귀족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천녕국이 이야기의 배경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조금 있으면 서주국과 북려국이 나온다. 이것뿐일까? 운공대륙에서 각기 한 자리 차지한 여러 성(城)과 상인 집단, 강호 세력, 은거한 고인들이 속속 등장하더니 나라가 셋 밖에 없는 줄 알았던 운공대륙에 또 하나의 나라 동오국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끝까지 가 보면... 운공대륙이 아닌 다른 대륙도 나타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것은 현재 만이 아니다. 수백 년 전 무너졌다는 대진제국의 역사와 그보다 더 오래된 종족 이야기도 나온다.

너무 막 집어넣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곰곰이 보면 결코 막 집어넣은 게 아닌 것이, 앞부분에서부터 슬금슬금 떡밥을 뿌려놨다. 물론, 중국에서도 연재로 진행되던 작품이다 보니 가끔 딱 안 맞아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완전히 뜬금없는 널뛰기는 없는 편이다.
알다시피, (이것도 지에모 작가 문체. 너무 오래 봐왔더니 나도 습관이 됐나 보다) 세계관만 크다고 해서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천재소독비>가 중국에서 이렇게까지 인기를 얻은 이유는, 역시 이야기 자체에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칠소의 이미지
고북월의 이미지

소설의 기본 스토리는 주인공인 한운석과 용비야가 가진 능력 + 타고난 출신을 이용해 운공대륙을 통일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길다 보니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는데, 전체적인 비중은 한운석과 용비야가 70% 정도이고 다른 인물들 이야기는 아무래도 분량이 적다.

비중 높은 조연은 의술이 뛰어나고 사람 좋은 고북월, 약재와 독에 능하고 한 미모까지 하는 고칠소이며 둘 다 끝까지 주인공과 함께 한다. 비중 높은 악역은 독과 검술에 뛰어난 데다 불사의 몸을 가진 백언청, 그 제자인 군역사, 선녀처럼 아름답지만 성격 더럽고 멍청하기까지 한 단목요 정도로 볼 수 있겠다. 물론 선/악을 딱 정할 수 없는 사람들도 꽤 등장한다. (언제 한 번 정리를...)

초반에는 용비야 팬클럽 여자들의 질투로 인한 유치한 괴롭힘이 이어지고 이를 해결하는 식으로 진행되면서 여타 가벼운 로맨스 소설 같은 느낌을 주지만, 뒤로 갈수록 심각한 사건과 감동적인 내용들이 쏙쏙 나온다. 고칠소의 과거, 목령아의 일편단심, 당리와 영정의 사랑, 백리명향의 외로움, 목청무의 우직함...

드라마 <운석전>은 그 방대한 이야기와 인물들을 채 10%도 못 그려낸 것 같다. 특히 고북월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드라마 <운석전>에 나오는 당리-영정 커플

분량이 분량이다 보니 언제쯤 마지막 종이책이 나올지 알 수 없고 독자들이 몇 명이나 따라와 줄지도 알 수 없지만, 앞으로도 이런 대 장편 중국 장르 소설이 국내에 속속 나오기 위해서라도 잘 되길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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