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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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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잡설

고룡의 국내 최초 정식 완역본 종이책

by 와룡 2019. 11. 25.

고룡님 작품 판권이 정리된 이래 마침내 국내 최초로 정식 완역본인 <다정검객무정검>이 종이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얼마나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일인지 모르겠다.

고룡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아쉬워하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완역본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협 소설이 잘 나가던 7, 80년대는 책은 나왔지만 여기저기 뜯어고치거나 빼먹은 해적판이고, 지금은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지만 무협 소설이 인기가 없어서 책이 안 나온다. 그 중간 어디쯤에서 나왔어야 하는데, 그때쯤 고룡님 작품은 저작권 소송에 걸려 해외 판권에는 눈도 돌릴 수 없는 상태였다. 김용님 작품은 저작권이 깔끔하고 인지도도 높은 데다 드라마가 계속 나오니만큼 잊힐 일도 없지만, 고룡님 작품은 일단 저작권 문제 때문에 드라마도 안 나오지, 국내에 인지도도 낮지... 정말 어렵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탓에 <천애명월도>처럼 전자책으로만 나와도 감지덕지였다. 다른 작품도 전자책이라도 나왔으면 하고 몹시 바랐다.

그런데 떡하니 종이책이 나왔다.

이 어려운 시장에서 용감하게 고룡님 작품을 선택해 종이책까지 낸 출판사에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보면 알겠지만 공들여 만든 티가 난다. 완역에다 감수까지 했고, 몸도 안 좋으신 좌백님이 추천사를 쓰셨고, 이재일님이 교정을 보셨다. 세상에나. 내가 번역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책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기 그지 없다. <천애명월도> 번역을 하지 않았더라면, 이번 기회를 놓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다.

<다정검객무정검>의 완역은 의의가 깊다. 왜냐하면 오래전에 국내에 번역되어 나왔을 때 등장인물 이름과 결말을 제멋대로 바꾸어서다. 나도 그 판본을 읽었는데, 그땐 고룡님을 잘 모르던 때라 당연히 초류향도 있으니 초류빈도 있겠지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황당무계한 일이다. 고룡님은 등장인물의 이름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다.

초류향(楚留香chu-liu-xiang)이라는 이름은 "곳곳에 향을 남긴다(四处留香si-chu-liu-xiang)"는 의미로 미남 풍류객 초류향의 멋스러움과 풍류를 비유하기도 하고, 절친인 호철화(胡铁花hu-tie-hua)의 이름과 별호에서 연상되는 나비(蝴蝶hu-die)와 짝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초류빈은 대체 무슨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지!
본디 <다정검객무정검> 주인공의 이름인 이심환(李寻欢)은 "환락을 쫓다"는 의미로 이는 이심환이 의리를 위해 약혼녀를 포기하고 스스로 풍류방탕아로 살았으나 사실은 제목처럼 다정한 순정남이라는 반어법이다. 그런 이름을 초류빈이니 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이름으로 바꿔놓다니!
임선아(林仙儿)는 설소하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이 되었는데, 사실 그 이름은 초반 등장 장면에서 보듯 선녀 같은 천하제일미녀이기 때문에 '선아'라는 이름을 주고 뒤에서야 그 실체를 폭로하는 반전을 선보이기 위한 것이다.
비련의 여인 임시음(林诗音)은 내가 중국 여자 이름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름이다. 내게 딸이 있다면 지어주고 싶을 정도로. "시를 읊는 소리"라니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운가. 그런 이름을 흔해빠진 설벽운으로 바꿔놓았다.
중국 소설을 제법 본 사람이면, 초류빈이니 설소하니 하는 이름이 전혀 중국스럽지 않으며 오히려 70년대 국내 무협 소설에서 흔히 썼던 온갖 멋만 부려놓은 이름인 걸 알 수 있다. 새삼스럽게 다시 분통이 터진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다정검객무정검>은 꾸준히 재번역 시도가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정식 완역본"이 나옴으로써 등장인물들이 제대로 된 이름을 찾았다.

<다정검객무정검>이 나온 기념으로 얼마 전에 <고룡전>이라는 책을 한 권 샀다. 고룡님 작품보다는 고룡이라는 사람에 관해 쓴 책이다. 하지만 고룡님은 그 작품과 사람을 떼어놓기 힘들 만큼 작품에 자신의 모습이 많이 묻어 있다. 개중에서도 <다정검객무정검>의 이심환은 정말이지 고룡님을 닮았다.

<고룡전>의 한 부분을 발췌해본다.

제목 밑에 "내게 술 한 잔만 있으면 세상살이에 위로가 되기에 족하다"고 써 있다. 인생이 곧 술인 사람.

 


이심환은 등장하기 무섭게 술을 마신다. 아비와 처음 만났을 때도 술을 마신다. 그 후에도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면 늘 술이 빠지지 않는다. 

술이란, 친구 사이의 우정이 계속 이어지게 해주는 접착제다.

이심환은 친구를 향한 마음이 여자를 향한 마음보다 컸고, 우정을 사랑보다 높이 쳤다. 그를 옭아매는 데 있어 그 무엇보다 중요한 족쇄는 바로 '의리'였다. 하지만 이심환은 기꺼이 그 족쇄에 묶이기를 바랐고, 그 속에서 고통받을지라도 마음만은 행복해했다. 그는 친구를 위해서라면 만 번 죽어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심환에게서 고룡의 그림자를 많이 보게 된다. 그 한 예가 목숨 걸고 술을 마시는 것이다.이심환은 차라리 기침을 하면 했지 술은 꼭 마셨다.

"잔을 반쯤 비우자마자 또 끊임없이 기침을 해댔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불그레한 병색이 번졌지만, 그래도 그는 남은 반 잔을 목구멍으로 털어 넣었다."

이처럼 앞뒤 돌보지 않고 술을 마시는 모습은 건강을 생각지 않고 마구 술을 마셔대던 고룡을 꼭 닮았다.

<다정검객무정검>에는 이심환이 허리를 굽히고 기침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그만큼 기침이 나오면 술을 마셔선 안 되는 게 당연했다. 친구들도 너나없이 말렸지만 이심환은 듣지 않았다. 이심환이 기침하는 것을 보고서도 술을 끊으란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은 아비가 처음이었다. 바로 그 마음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 통함 때문에, 두 사람은 막역지우가 되었다.

무청쉐 <고룡전> 발췌


고룡님은 저렇게 몸 아끼지 않고 술을 마시다 48세라는 한창나이에 돌아가셨다. 생전에 XO 브랜디를 너무 좋아했기에 친구들이 그 무덤에 XO 브랜디를 48병 넣어주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 무협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 차츰차츰 애정을 갖게 되었고 나중에는 무협의 새 시대를 여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신 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무협의 새 시대를 열 작품을 다 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어쩌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리움이 더 큰지도 모르지만, 또 이렇게 책이 나온 것만 해도 기쁘지만, 살아 계셔서 한국어판 서문이라도 써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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