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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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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잡설

<청평악>에서 보는 송나라의 특징

by 와룡 2020. 8. 29.

<청평악>을 보다 보면, 송나라의 특징이 조금씩 보인다. 물론, 드라마가 그 시대상을 잘 반영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는데, 제작사가 그런 점에서는 워낙 믿을만하다 보니 그렇게 믿기로 했다.

어렸을 때 배운 것에 따르면, 당나라는 화려하고 귀족적인 나라고 송나라는 서민적인 나라다. <청평악>을 보면 그런 "서민적"인 부분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복장

송나라의 황실 복장은 당대나 청대와는 확연히 다르다. 화려함을 싹 지우고, 수수하면서도 우아미가 있는 복장이다. 처음 볼 때는 황제의 평복이 너무 수수해서 사대부인 줄 알았다. 개방적이고 활달했던 당나라와 달리, 보수적이고 문을 숭상한 송나라는 좀 더 검소하고 수수한 복식을 지향했다. (바이두 백과) 경제력이나 생산력을 당나라보다 뛰어났음에도 화려한 복장보다는 간소한 복장을 했고, 본연의 색상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출처: https://wenku.baidu.com/view/24624f2e1711cc7931b716ce.html)

<청평악> 한 장면 (출처: 바이두 백과)

그래서인지 색이 곱고 우아한 느낌은 있지만, 특히 여성 복장에서 날아갈 것 같은 하늘하늘한 아름다움이나 척 봐도 귀족임을 알 수 있는 웅장함은 덜 하다. 아래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맵시 있고 아름다운 것은 당나라 복식이다. 서민적인 송나라라고 하지만 꽤 보수적인 분위기로 여성의 정조 관념마저 생겨나면서 당나라 때처럼 얇은 사의라거나 깊이 파인 옷 같은 것은 잘 입지 않게 된 듯하다.

당나라 여성 의복 (출처: https://www.sohu.com/a/147339011_804824)
송나라 여성 의복 (출처: https://www.sohu.com/a/147339011_804824)

황제의 예복 차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청나라 황제의 화려한 금빛 옷을 보다가 송나라 황제 옷을 보면 놀라울 따름이다. 한편으로는 떡하니 황금색 옷을 입고 권위와 재력을 자랑하는 것보다 우아해 보이기는 한다.

청나라 황제 복장. <후궁견환전> 한 장면 (출처: 바이두 백과)
<청평악>에서 황제와 황후의 예복 차림 (출처: 바이두 백과)

당나라 때도 황제의 곤룡포에 검정과 빨강을 쓰긴 했지만 훨씬 화려한 자수가 있고 자잘한 장식도 많다. 

당나라 황제 곤룡포 (출처: 바이두 백과)

호칭

또 하나, 서민적인 느낌이 많이 드러나는 것은 호칭이다.

일단 황제를 부르는 호칭이 그 흔한 '폐하'도 아니고 당나라처럼 무슨 신이라도 되듯 '성인'도 아니며 무시무시하게 높은 청나라 때의 '황상'도 아니다. 

관가(官家)라니. 얼마나 친근한 이름인가. 물론 당시에는 혼용해서 쓰지 않았겠지만, 관가에는 '관리'라는 의미도 있어서 황제를 하늘의 아들이라기보다는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으로 느껴지게 한다. 

황실 내에서의 호칭도 훨씬 친근하다. 황자와 공주가 사적으로 황제를 부를 때는 '부황'이 아니라 '아버지(爹爹)', 황후를 부를 때도 '모후'가 아니라 '어머니(娘娘)'라고 한다. 사실 낭랑(娘娘)이라고 하는 이 단어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나는 아버지를 부르는 방식에 맞춰서 어머니라고 이해했다. 후궁이나 신하들이 '낭랑'이라고 부를 때는 당연히 '어머니'가 아닌 '마마'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청평악>에서는 다른 후궁들을 낭랑이라고 부르지 않고, 여인에 대한 존칭인 '낭자(娘子)'라고 하니 황후와 후궁의 호칭은 분리해서 사용한 것 같다. 황제가 태후를 부를 때도 모후나 태후가 아닌 '대낭랑(大娘娘)'이라 좀 더 친근하다.

후궁 소생 황자나 공주가 친어머니를 '모비'라고 부른 것이 정확히 어느 시대인지는 모르겠으나, 후진 때 황제의 생모를 황태비에 봉한 일이 있다고 하니 그때부터 그렇게 불렀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청평악>을 보면 신기하게도 황후가 아닌 친어머니를 '저저(姐姐)'라고 부른다. 본래는 언니라는 뜻이지만 송나라 때는 다른 용도로 썼음을 알 수 있다. 모비라는 단어는 격식을 차리는 느낌인데 '저저'는 좀 더 친근하게 들린다.

고증 여부를 떠나서, 인종 황제가 조 황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나 조 황후가 사이 좋은 후궁 묘심화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친근한 느낌이다. 게다가 지독한 청나라 후궁 싸움을 생각하면(물론 드라마에서), <청평악>에 그려지는 후궁들은 귀엽기 짝이 없다. 장필함만 빼면 다들 착하디 착하고, 장필함도 그냥 고집 센 어린애 같을 뿐 그다지 독한 여자도 아니어서 후궁은 평화롭다.

개인적으로는 청나라 드라마에 나오는 황실이 가장 권위적이고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 비해 송나라는 친근하기 그지없어서 보기 좋다. 청나라에서 특히 싫었던 것은 환관이 '종놈(奴才)'이라고 자칭하며 자신을 매우 낮추는 부분인데, <청평악>에서는 장무칙이 황제에게 '종놈'은 커녕 '소인'도 아닌 '신(臣)'이라고 하는 것에 몹시 감동받았다. 


송나라는 태조 때부터 전황조의 황족을 죽이지 않은 정말 얼마 안 되는 평화적인 나라이며, 신하들을 우대했기로 유명하다. <청평악>에서 보듯 송나라 때는 아예 신하들에게 의자를 내려 나란히 앉아서 정무를 논했는데, 그다음 한족 황실인 명나라 때는 신하들에게 각박하기로 유명해서 의자 따위는 싹 치워버렸다고 한다.

송나라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는 문약해서 이민족의 침입을 당한 가엾은 나라다. 사람의 피를 들끓게 하는 화려하고 웅장한 면도 적어서 내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하지만 <청평악>을 보고 나니 그 친근한 느낌이 무척 마음에 든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데도 사치를 멀리한 점도, 문치를 강조해서 조정에서도 정치적인 논의가 활발한 점도 좋은 방식이라 느껴진다. 

아래는 진순신의 <중국의 역사>에서 발췌한 송나라의 특징에 관한 내용이다.

문관 정치가 확립된 것은 송대였다. 그 이전인 오대는 무인 정치라 할 수 있다. 오대 이전의 당나라, 그리고 남북조는 귀족정치였다. 과거에 급제한 수재들이 문관으로서 정치의 본류를 형성한 것은 송나라 이후부터이다. 이 체제는 20세기의 청말까지 계속되었다. (중략)
북송에서는 황제가 즉위하면 궁중의 안쪽 깊은 곳에서 일종의 비밀의식이 행해졌다. 그것은 태조 조광윤이 자손을 위해 유훈을 돌에 새겨 황실 깊숙이 안치해 놓은 것을 배견하는 의식이다. 황제 한 사람만이 그 돌에 새긴 유훈을 보고 그것을 자신의 가슴에 새긴 것이다. 재상이라 해도 그 석각 유훈의 내용은 모른다.
정강 2년(1127), 금군이 개봉을 유린했을 때 궁전도 파괴되어 처음으로 석각 유훈이 알려졌다고 한다. 그 유훈이란 후주 왕실 시씨의 뒷바라지를 언제까지나 계속할 것, 그리고 사대부를 언론의 이유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중략)
석각 유훈의 내용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는데, 조정이 하는 것을 보고 언론으로는 살해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반에서도 알았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송대에서는 언론전이 활발하여 많은 논객이 배출되었다. 물론 많은 제약은 있었지만 그보다 이전의 시대에 비하면 송대는 훨씬 자유로웠다고 할 수 있다. 귀족사회에서는 벌레와 같았던 서민이 인간다운 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 7권 '송나라 창업'에서
한나라나 당나라에 비하여 송나라는 어쩐지 기세가 오르지 않은 시대라는 느낌이 있다. 한도 당도 천산을 넘는 대원정을 감행하고 있어, 화려한 일화가 역사에 장식되어 있다. 그에 대하여 송은 요와 서하, 금과 원에게 괴로움을 받아 별로 신나는 이야기가 없다. 전체적으로 침체된 느낌이 든다.
그렇지만 시대를 잘 음미해 보면, 우선 경제적으로는 송나라는 한나라나 당나라보다 훨씬 웃도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장안과 개봉을 비교한 대목에서도 말했지만, 송나라의 서민이 지니고 있는 힘은 한나라나 당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하였다. 문자 그대로 불이 꺼진 장안의 밤과 휘황찬란하게 불이 켜지고 인파가 끊이지 않는 개봉 와자의 밤을 비교해 보면, 거기에 감도는 활력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송나라는 유례없는 경제대국이었다. 그리고 평화까지도 돈으로 사고 있었다.

⏤ 7권 '신법의 파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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