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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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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잡설

쾌도난마 - 한국형 무협 소설

by 와룡 2007. 11. 7.

한국 무협을 본지 참 오래되었다.
아마도 몇 권 본 후 크게 실망한 후부터. 당시에도 물론 유명한 작품이 꽤 있었고, 현재도 이름 높은 작가들의 수작이 나오고 있다. 제목만 들어놓고 보지 못한 작품이 여럿.

수작이라 꼽는 그 작품들을 아직까지 보지 않은 이유는, 우선 그 작품들이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선입견 때문이었다. 이어 작품들을 구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렇다고 평만 믿고 무작정 사보기엔 좀.)

내 스타일이라는 것은, 콕 찝어 말하자면 고룡식이다. 그럼 고룡식이란 무엇일까? 일단 주인공이 강해야 한다. 그리고 답답할 정도로 착해선 안된다. 이야기도 단순히 사대문파의 등장과 무림의 음모, 사파와의 혈투 이런 것이 아니어야 한다. 뭔가 복잡하게 꼬여 있어야 하고, 그 속에서 억지가 아닌 폭소를 자아내야 한다. 또 한가지 중요한 점은, 주변인물들이 멋있어야 한다. 제 나름대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주변인물들이 주인공과 싸우거나 혹은 친구가 된다.

하지만 국내에는 고룡식은 커녕 김용식 무협도 찾기 힘들었다. 아마도, 국내 독자들의 성향이 '고루한' 정통 무협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좀 '먹히는' 작품은 폭소무협이라고나 할까, 일단 웃겨야 한다. 웃기려다보니 억지스런 상황들이 연이어 벌어지고, 그러자니 내용 자체도 무척 가볍다. 나 역시 우스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억지 개그에는, 더욱이 그런 걸 무협에다 옮겨 놓은 데는 영 재미를 느낄 수가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한 수작이란 그런 무협이 아니다. 좌백, 한상운 등 타깃이 '중고등학생'이 아닌 '80년대 중국 무협에 익숙한 매니아'층인 작품들이다.
사실 평은 열심히 들은 반면, 보기가 무서웠다. 폭소 무협의 반대편에 선 그들이 어쩐지 너무 심각할 것 같다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 때문에. 물론, 난 그 작품들의 내용은 전혀 모른다. 그래서 '절대 그렇지 않다'고 누군가 대꾸한다면 할 말이 없다.

서론이 길었는데, 어째거나 오랜만에 한국 무협인 쾌도난마를 보게 되었다.
대원이 내 놓은 작품들 중 무협이 워낙 희귀해서, 더군다나 그림체가 마음에 들어서 (아마도 그림스타일이기 보다는 고전적인 배경의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이겠지만) 읽어 보았다.
1권을 읽으면서, 아, 이것이야 말로 정통(?) 한국 무협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단순 무식의 대명사 주인공이 힘만 믿고 이리 저리 주먹질을 해댄다. 어쩌다 그 힘에 끌려든 자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이런 저런 폭소가 터져나온다.
폭소의 주 소재는 주인공의 폭력아래 당하는 주변 인물들, 그리고 아무에게나 틱틱 반말을 해대는 주인공의 제멋대로인 성격이다.
여기서 나는 한국 무협을 느꼈다. 무협이라고는 하지만, 이 작품은 일반적인 조폭 영화의 배경을 무림으로 옮겨놓은 것 뿐이다.
반말? 중국에 반말/존댓말이 어디있던가. 물론 한국 정서에 맞추다보니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 반말/존댓말이 작품의 주 소재를 이룬다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이어 상단. 상도니 주몽이니 갖가지 드라마에서 상단이 주 소재가 되었던 영향일까. 이것 역시 한국스럽다.
또 표국의 주인을 국주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세가의 주인은 가주, 상단 주인은 단주다. 천지회의 주인이 회주였던가? 역시 한국 무협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명칭이다. 이깟 명칭이 뭐 중요하냐고 물으면, 물론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이런 점에서 '아, 이건 한국 무협이구나'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인공이 들어앉은 장가상단을, 낮은 담장에 처마 놓고, 신발 벗고 들어가면 온돌방이 있는, 그런 한국 전통 가옥으로 머릿속에 그려놓고 있다.

한국형 무협이 나쁘지만은 않다. 다만 내 취향이 아닐뿐.
그렇다고 쾌도난마가 졸작이냐면 그런것도 아니다. 1권에서 너무 한국 조폭 영화를 연상시켜서 별로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무협다운 느낌이 났다. 2권의 비무도 괜찮았다.
단순무식에서 갑작스레 똑똑해진 장량의 변신이 조금 억지스럽고, 스토리를 관통하는 주제가 뭔지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나름대로 주인공이 능력있고, 주변인물들의 개성이 살아 있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어 갈지 궁금하지만, 현대식 어투와 고전 어투를 섞어 쓰는 것만은 피해주었으면 한다. 할아버지 말투에서 청년 말투로 변화하는 장량의 대사도 좀 더 어색하지 않게 다듬어 주었으면.

오랜만에 본 한국 무협의 실상을 일깨워주는 한 편, 나 역시 단순 무식하고 웃기는 이야기를 좋아하는구나...를 깨닫게 해 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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