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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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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영화와 드라마

때늦은 <천일의 스캔들> 이야기

by 와룡 2008. 10. 8.


소녀시절 좋아하던 중세 유럽 왕실의 이야기라고 해서 관심을 갖고 있던 영화였으나 소리소문 없이 개봉했다 사라져, 얼마전에야 겨우 보았고, 본 후에는 과연 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는지 알게 되었다. 배우들이 제아무리 유명하건, 줄거리가 얼마나 흥미롭건, 영화를 저런식으로 만들면 실패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원제인 The ther boleyn girl과 동명 소설이 원작으로, 역사의 뒤편에 숨겨진 헨리 8세의 여성편력을 다루고 있는데 당시 영국의 역사를 훑어볼 수 있어 흥미로웠다. 영화를 보기 전에 책을 먼저 보
려했는데, 내용은 재미있음에도 긴장도가 조금 떨어지는 필력이라 결국 끝까지 보지는 못했다.
그래도 책이든 영화든 종종 로맨스 만화의 배경이 되는 영국의 왕실 이야기에 다시금 관심을 불러일으키게끔 해주었다.

당시 영국은 젊은 헨리 8세를 두고 시모어 가와 하워드 가가 권력을 잡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중이다. 마침 형이 죽은 후 형수인 스페인의 공주 캐서린과 결혼한 헨리 8세에게는 연상의 부인에게서 아들이 없어 고민거리였으므로, 두 가문에서는 여자를 통해 왕의 마음을 얻으려 했다. 불린 가는 하워드 가의 사위집안으로 막내딸 메리는 이미 결혼을 했음에도 왕의 눈에 띄어 그 정부가 된다. 12살에 벌써 결혼한 것도 놀랍지만, 결혼한 여자를 아무렇지 않게 정부로 들이는 왕이나 그것을 묵인하는 남편이나, 상식적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옛 시절의 이야기다.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큰딸 메리는 본래부터 야망이 큰 소녀로 동생의 자리를 부러워(?)한다.
사가들의 말에 따르면, 메리는 금발의 섹시한 미인인 반면, 앤은 흑발에다 활발하고 지적인 외모라고 한다. 처음에는 메리에게 끌렸던 왕이지만, 그녀가 두 아이를 나은 후 매력이 줄어들자 궁중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똑똑한 앤에게로 마음이 넘어간다.
앤은 동생같은 정부는 되지 않겠다며 왕을 유혹하여 캐서린 왕비를 폐하게 만든다. 그렇잖아도 나이가 든데다 아이라곤 딸 메리(이후 블러디 메리라고 불리는 영국의 여왕이 됨)밖에 없던 왕비는 지난날 황태자였던 헨리 8세의 형과 결혼했던 것을 핑계로 헨리 8세와의 혼인이 무효화된다. 마침 함께 프랑스를 쳤던 스페인의 황제(캐서린 왕비의 조카)가 영국과의 동맹을 깨고 교황을 감금하는 바람에 스페인에 대한 헨리의 분노가 커졌을 때다.

왕비가 되기 전에 한 때 퍼시 공작가의 후계자와 결혼까지 약속했던 앤의 소문이 왕의 귀에 들어가자, 왕은 메리를 불러 소문의 진위를 확인한다. 언니 때문에 사랑하던 왕을 잃은 메리이지만 언니와의 화해를 위해 소문이 거짓이라고 대답하며, 덕분에(?) 왕은 앤에 대한 오해를 풀고 그녀를 왕비로 삼는다.
헨리 8세의 두번째 왕비 앤 불린은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아들을 가지려고 하지만 이미 나이가 든 왕이므로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정치적 목적으로 한 결혼이었고 왕의 여성 편력을 아는 그녀인만큼 아들를 갖기 전까지는 자나깨나 불안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왕 또한 당차고 고집센 그녀에게 흥미를 잃어갔다. 첫째 딸 엘리자베스(이후 영국의 명군 엘리자베스1세가 됨)를 나은 후 아들을 사산한 그녀는 결국 동생(영화에서는 동생, 책에서는 오빠로 나옴) 조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으려고 한다. 결과론적으로는 실제로 벌어지지 않은 일이지만, 조지의 아내인 제인 파커가 이를 목격하고 왕에게 고자질함으로써 앤은 간통 및 근친상간의 죄목으로 처형을 당하게 된다.

메리는 남편인 윌리엄과 다시 만나 왕과의 사이에서 난 두 아이를 그의 아이로 키우지만, 윌리엄은 곧 유행병으로 죽고 만다. 역사에는 왕비였던 앤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메리를 많이 도와주었다고 되어 있다.
캐서린 왕비와의 파혼을 위해 교황의 허락을 받을수 없었던 헨리는 로마 가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성공회를 독립시키는데, 이는 영국 역사상 유명한 일이다(그 원인이 앤때문이었는지 명확치 않지만).
앤이 죽은 후 시모어 가의 제인 시모어가 왕비 자리에 올라 그토록 염원하던 헨리 8세의 아들을 낳았다. 출산 후 그녀는 곧 죽고 말았지만 헨리 8세는 아들을 낳아준 그녀를 진정한 부인으로 여기고 애도하면서 죽은 후에도 그녀를 옆에 묻히도록 했다고 한다.
헨리 8세의 왕비는 모두 6명으로, 제인 시모어 이후 앤 클리브즈, 캐서린 하워드, 캐서린 파아가 있다. 이중 앤 클리브즈는 정략 결혼으로 그녀의 외모에 실망한 왕에 의해 혼인 무효당했고, 캐서린 하워드는 앤 불린과 마찬가지로 혼전 순결 문제와 간통으로 처형당했다.

The other boleyn girl이라는 제목에서 그 '또다른 불란가 여자'는 왕비가 되어 화려한 삶을 살다간 앤이 아니라 역사의 뒤편에 조용히 자리했던 메리 불린일 것이다. 영화 시작시 앤과 메리가 술래잡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마지막에 앤이 메리를 잡은 후 '이겼다'하고 소리친다. 왕을 두고 벌인 두 여자의 싸움에서 그녀가 승리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승리했을 망정 짧지만 사랑에 충만한 한 때를 보낸 메리에 비해 왕비 앤의 삶은 조금 가엾게 느껴진다.

불린가 여자들의 이야기이긴 하나, 앞에서 말했듯 여기서 파생되는 여러가지 영국 역사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첫 왕비 캐서린의 딸 메리는, 앤 불린에 의해 공주 자리를 박탈당하고 서녀 취급을 받은데다 어머니를 지지(?)했던 로마 가톨릭에 호의적이었다.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가 그녀를 복귀시킨 덕에 에드워드 6세 및 제인 그레이 이후 왕위 계승권을 확보하여 영국 역사상 최초의 여왕으로 등극하여 로마 가톨릭을 부흥시켰다. 더불어 신성 로마제국의 펠리페 2세와 결혼하면서 반대파들을 숙청하여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미워했던 이복 동생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숨을 거둔다. 엘리자베스 1세는 어머니 앤 불린에게 명석함을 이어받은 탓인지 명군이 되었는데, 결혼하지 않은 처녀 왕으로써 '무적 함대'라 불리던 펠리페 2세의 함대를 쳐부수는 등 유명한 일들을 많이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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