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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미디어/영화와 드라마

<경여년>, 다시 시작하게 된 까닭

by 와룡 2020. 8. 9.

(출처: 바이두백과)

마오니는 중국 무협/판타지 소설계에서 손꼽는 작가 중 한 명이다. 2015년에 <장야>가 인터넷 문학 비엔날레에서 상을 받고, 2017년에는 가장 잠재력 높은 IP로 선정되어 2018년에 드라마가 나오면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졌다. 한창 <장야> 시즌 1이 방영 중일 때 훌륭한 무협 드라마라는 평가가 돌았는데, 나도 그때 마오니를 알게 되었고, 한참 손을 놓고 있었던 중국 무협 소설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했다.

2000년대 초반 젊은 신진 무협 작가들을 중심으로 이미 중국 무협 소설은 판타지와 하나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그 시점에서 약간 희망을 잃었다고 볼 수 있는데, 무협에 나오는 무공도 '있을 수 없는 환상'이라는 점에서는 판타지의 마술과 다를 게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한 때 전성기를 형성했던 중국 신파 무협 소설의 배경과 주제가 비교적 실제적인데 반해, 가상의 나라, 마술처럼 보이는 무공이 많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는 버릇이 나왔다.

어쨌거나 요즘에는 가상 세계를 다룬 로맨스판타지를 많이 읽어 좀 익숙해졌는지, 구주표묘록 같이 가상 세계를 그린 무협 판타지도 아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구주표묘록과 장야의 독자평을 뒤적이다가 작가 강남과 마오니의 스타일을 비교한 글을 보고 두 작품을 대강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 때문일 수도 있고, 드라마 장야의 배우가 내게 맞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아무튼 장야는 완주하지 못했다.

그런 다음에 나온 마오니의 다른 작품 <경여년>은 조금 기대가 있었다. 근데, 아쉽게도 소설 첫 부분이 다소 비동양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고, 드라마 첫 부분은 또 유머러스한 B급으로 나오는 바람에 초반에 중단했다. 하지만... 내가 워낙 좋아하는 진도명이 나오는 데다 요즘 들어 볼 드라마도 없고 해서 다시 시작한 결과....! 이젠 완전히 빠져들었다.

계속 보게 해 준 계기, 경제 역 진도명 (출처: 바이두 백과)

그래서, 비록 드라마를 다 본 것도 아니면서 급하게 글을 써 본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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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여년>은 무협판타지를 배경으로 정치 싸움을 잘 버무린 작품이다. 배경은 가상의 나라인 '경'이며, 주인공은 경나라의 호부시랑이자 사남백으로 봉해진 범건의 사생아다. 가상의 세계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주변국이나 정치 시스템은 거의 고대 중국을 따랐다. (딴 얘기지만 대부분 소설에서 채택하는 가상 세계가 비슷한 걸 볼 때 중국 작가들의 상상력이 어떤 이유에서건 제한되어 있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주인공은 현대에서 근무력증을 앓다가 <경여년>의 이세계로 영혼이 넘어와 갓 태어난 범한의 몸에 들어간다.(원작의 설정이며, 드라마는 조금 다르다) 태어나면서 어머니가 죽고 위험에 처한 그를, 어머니의 호위 무사인 오죽이 구해다 담주에 있는 사남백의 시골집으로 보내 자라게 한다. 어려서부터 위험에 노출된 데다 이미 성장한 영혼이 들어있는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남긴 서적을 보고 알아서 내공을 익히고, 영리한 판단으로 집안을 장악해 나가고, 독에 능통한 스승으로부터 독을 배우고, 오죽에게서도 무공을 훈련받는 등 흔한 어린아이 답지 않게 자란다. (심심해서 조설근의 홍루몽을 베껴 누이동생에게 보여줌으로써 훗날 문학계의 거장(!)으로 칭송받는 길도 열어둔 것은 덤이다)

그렇게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 성인이 된 후, 범한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나라의 수도인 경도로 들어가면서 슬슬 무시무시한 정치 싸움에 휘말린다. 경도에 간 첫날 제묘에서 우연히 장공주 이운예의 사생아 임완아를 만나서 한눈에 반하는 것을 볼 때, 이 작품은 절대로 로맨스 장르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즘 로맨스 판타지를 많이 봤더니 남성향 작가가 쓴 무협 정치물과 여성향 작가가 쓴 로맨스 정치물의 차이를 확실히 알겠다. 

어머니가 꿈꾸던 세상

범한이 경나라 안의 수많은 거물과 엮이는 까닭은 모두 어머니 때문이다. 대체 그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머니와 엮인 거물, 아버지 범건 (출처: 바이두백과)
어머니와 엮인 거물, 감사원장 진평평 (출처: 바이두백과)
어머니와 엮인 거물, 황제 (출처: 바이두백과)

경도에 와서 비개가 알려준 대로 감사원에 가서 어머니가 남겼다는 비석을 본 범한은 "모두가 평등하고 즐겁게 지내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어머니의 포부에 감동을 받는다. 그는, 누가 봐도 미래에서 왔을법한 개념을 가진 어머니가 아마도 그 위험한 포부를 실행하려다가 목숨을 잃었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은 '경여년 - 여분의 삶을 축복하며'라는 제목처럼, 근무력증에 시달려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죽어가던 중에 새로이 얻은 삶을 행복하게 살 생각만 할 뿐, 그런 고고한 포부를 품을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여겼다.

물론, 정말 그렇게 된다면 이야기 진행이 안되겠지.

범한 자신이야 그렇게 살고 싶다한들, 세상을 바꾸려던 어머니 몸에서 태어나 정치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있는 데다 머리를 점령하고 있는 현대인의 사상이 있는 한 그렇게 될 수가 없다.

어머니가 남긴 비석 (출처: https://kuaibao.qq.com/s/20191218A0G2Y600?refer=spider)

그는 이미 어머니가 남긴 유산, 막대한 부를 축적한 황실 내고 장악권에 깊이 엮여 있다. 처음에야 임완아가 그때 그 '닭다리 소녀'인 줄 몰라 혼인하지 않으려 했지만, 어차피 임완아를 사랑하게 된 이상 내고 장악권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다. 게다가 마음 터놓고 지내는 친구가 된 등재형이 그에 연루되어 죽었기 때문에, 현대인인 범한으로서는 단순히 '호위 무사의 죽음'이라는 말로 그 원한을 잊을 수도 없다. 내키지 않아도, 결국 어머니가 꿈꾸던 포부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쩜 저렇게 연기를 잘할까

처음에는 B급 우스개로 범벅되었으리라 생각했던 드라마 <경여년>은 가면갈수록 훨씬 복잡한 주제와 인생사를 보여준다. 그 사이에서 주인공 범한의 온갖 계략과 시치미 떼는 능력이 돋보이는데, 이걸 제대로 살린 범한 역 배우 장약윤에게 감탄이 절로 났다. 솔직히 말해, 요즘 웹소설 기반 중국 소년/소녀 드라마의 주인공이 연기보다는 외모 위주로 선정되는 통에 이따금 재미를 못 느낄 때가 있었다. 얼마전에 본 <학려화정>은, 배우들의 연기가 압권이었기에 좋아하기도 했는데, <경여년> 또한 그랬다. 장약윤은 (비록 미소년이라는 원작 설정과는 조금 어긋나지만) 범한 그 자체다. 또 누가 그를 대신해 범한을 연기할 수 있을까?

임공 사건에서 무시무시한 세 사람에게 여러 차례 떠봄을 당하면서도 그때그때 훌륭한 시치미로 위기를 넘긴 주인공의 지략도 놀랍지만, 그때마다 다른 표정, 다른 연기를 보인 장약윤에게 깜짝 놀랐다. 솔직히 장약윤뿐만이 아니다. 진도명 아저씨는 어차피 연기의 대가이니 차치하더라도, 아버지 범건, 감사원장 진평평, 재상 임약보 같은 거물들은 물론, 감초이자 가장 오래 살아남을 것 같은 왕계년, 속에 뭔가를 숨긴 듯한 태자까지 어쩜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지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둘째 황자 또한 괴짜 같은 스타일이 아주 잘 어울린다. 세상에, 이런 드라마를 두고 내가 B급이라는 이유로 초반에 손을 뗐었다니!

캐릭터들

<경여년>의 또 다른 매력은 캐릭터의 입체성에 있다. 어쩌면 이건 내가 이 작품에서 지난날 무협 소설을 떠올리게 하는 향기를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판타지든, 정치물이든, 후궁 싸움이든 흔히 전형적인 캐릭터가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똑똑하고 계략에 뛰어난 주인공, 그 옆에 있는 좀 막무가내지만 싸움은 잘하는 절친, 주인공을 남몰래 보호하는 그림자형 호위, 주인공을 질투하고 괴롭히는 뻔한 악역 등. 그리고 보통 그런 인물들은 등장하는 순간부터 무슨 역할을 할지 훤히 눈에 들어온다.

<경여년>에 그런 것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일단 여주인공 임완아 주변이 좀 그렇다), 전혀 색다른 역할을 하는 인물도 많다. 큰 예가 바로 왕계년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지나가는 졸개 정도로 느껴지다가 나중에는 돈을 밝히는 흔한 관리 노릇을 하더니, 나중에는 감사원장의 한 팔이 되어 나타나고, 온갖 계명구도로 주인공을 돕는다. 게다가 비록 돈은 밝히지만 사람의 목숨을 귀중하게 여길 줄 아는 인도적인 성품이기도 하다. 범한이 처음 만난 친구, 등재형이 죽은 후 왕계년은 끝까지 범한 곁에 남아 그 조력자가 되어줄 사람으로 발돋움했다. 그를 보면 <육소봉전기>의 노실화상이 떠오른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캐릭터를 스쳐가듯 묘사하다가 중요한 역할로 단숨에 발돋움시키는 것은 고룡님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니까.

왕계년 (출처: 바이두백과)

또 한 사람은, 둘째 황자. 처음에는 자꾸 얼굴을 숨겨서 대체 어떤 중요한 역할을 맡기려고 저러나 하고 궁금했다. 일단 둘째 황자는 어머니부터 특이하다. 책을 좋아하는 우아한 숙 귀비는 아들이야 황위 다툼에 나오건 말건 아무 관심도 없다. 아들은 어머니를 닮아 책을 좋아하며, 역시 어머니 성품을 닮은 구석이 있는지 예법 같은 사소한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고 심심하면 길거리에 자리를 펼치고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책을 읽어댄다. 전형적인 황자 같이 굴지 않지만 필요할 때는 날카로운 구석도 있다. 마지막까지 보지 않아서 그의 결말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꼭 마음에 드는 캐릭터다.

자꾸 길거리에서 판 벌리는 둘째 황자 (출처: 바이두백과)

경도 사남백부에 있는 범건의 둘째 부인과 그 아들 범사철도 예상 밖이다. 보통, 그런 입장에 있는 사람이면 집안 후계권을 놓고 범한을 괴롭히기 마련이다. 그러다 실패하면 이를 갈면서 복수를 다짐하고 결국에는 적과 내통(?)하면서까지 주인공을 해치려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흔한 설정인데, 일단 범사철은 세상 단순하고 돈을 벌어 아버지같이 호부에 자리를 얻는다는 소박한 목표만 있는 아이인 데다, 그 어머니는 아들의 자리를 뺏을지도 모를 범한을 조금 골탕 먹일 생각은 했지만 애초에 죽이려 할 만큼 모진 성품이 못 되고, 나중에는 아들에게 잘해주며 집안의 이름을 빛내는 범한에게 호감을 갖고 보호자로 돌아선다. 이 얼마나 따뜻한 가족애(?)인가. (배 다른 세 남매가 사이좋게 한 마차를 타고 가면서 티격태격 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참 흐뭇하다)

초반 개그를 담당하는 두 사람, 비개와 왕계년 (출처: 바이두백과)
귀여움을 담당하는 두 사람, 대보와 범사철 (출처: 바이두백과)
OO같지만 멋있어를 담당하는 연소을 (출처: 바이두백과)

의리도 빼놓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내가 <경여년>에서 감동받은 것은 무협에서 볼 수 있는 우정과 의리다.

은혜를 목숨으로 갚겠다는 등재형 (출처: 바이두백과)

조금 일찍 죽어 아쉽긴 하지만, 등재형은 범한에게 친구 이상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처자식과 멀리 떠나 행복하게 살려했던 등재형이지만, 위험한 경도에 혼자 남겨질 범한이 걱정스러워서 결국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다. 남기로 결심한 그가 범한에게 와서 하는 말은 절절한 동지애가 아니다. "시크한 상 무림인"답게 "너 같이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설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것 같으니 내게 돈도 주고 집도 주고 소도 주면 귀찮지만 좀 지켜주겠다"였다. 게다가 "나한텐 가족이 젤 중요하니까 위험해지면 난 바로 도망갈 테니 넌 알아서 해라"라고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위험이 닥치자 그는 스스로를 희생하면서까지 범한을 구하려 했다. 그 뜨거운 의리를 또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북제 고수 정거수와 싸우는 범한과 등재형. 여기서 범한이 각성한다. (출차: https://baijiahao.baidu.com/s?id=1658417491200768869&wfr=spider&for=pc)

같은 작가의 <장야>에서도 조소수와 녕결이 춘수정 싸움을 하러 가기 전에 유사한 대화를 나누는 부분이 있다. 무림인들 간의 의리를 저렇게 시크하고 간결한 대화로 풀어나가는 것이 마오니의 특징인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알아보니 등재형 캐릭터는 드라마에서 원작과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이런 의리와 우정은 드라마 판이다)

사실, 이 드라마를 멈췄다가 다시 본 것은 진도명을 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진도명 아저씨가 아니더라도 멋진 캐릭터가 너무 많아서 손을 놓지 못하고 보고 있다. 하지만, 진도명이 나오지 않았더라면, 다시 시작하지도 않았을 테니 그랬다면 이 드라마가 얼마나 멋진지도 몰랐겠지. 어떤 결말이 날 줄은 아직 모르지만, <학려화정> 못지않게 잘 만든 드라마로 추천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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