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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미디어/영화와 드라마

강호란, <설영웅수시영웅>

by 와룡 2022. 6. 5.

올해 나오는 무협 드라마가 뭐 있나 찾아보다가 발견한 <설영웅수시영웅>. 온서안의 동명 원작 소설 시리즈를 각색한 드라마다. 소설은 비록 우리나라에 소개된 적 없지만 <사대명포> 시리즈와 이어지는 내용이어서, 채경이나 제갈신후 등이 등장한다. 물론 이 드라마에는 제갈신후나 사대명포가 안 나오겠지만(24부까지 보니 제갈신후가 등장했다. 와우 사대명포도 언급됐는데 혹시 나올지도…?). 드라마가 인기를 얻어 국내에 원작 소설이 소개되길 바라며 글을 시작해본다. (소설 내실 분은 제게 연락을...)
작년인가, 텐센트가 향후 10년간의 고룡 전체 IP 판권을 사들이고(아마도 드라마, 게임 같은 2차 창작물인듯), <천룡팔부>, <설중한도행>, <설영웅수시영웅> 등 굵직한 무협 드라마를 선보이겠다 발표하면서 한때 중국에 무협의 중흥기가 오는 게 아닌가 하는 기대가 있었더랬다. 하지만 막상 <천룡팔부>, <설중한도행>의 뚜껑을 열어보니 실망스러워서 여기서 끝인가 싶었는데, <설영웅수시영웅>이 다시 기대에 불을 붙였다고 한다. 나도 <천룡팔부>는 3편 정도 보고 너무 예스러워서 그만뒀고, <설중한도행>은 다 봤지만 어딘지 애매해서 아쉬운 차였던 터라 이 작품에 기대가 컸다. 특히 감독이 "멋진 무협 드라마를 기대한다"는 팬에게 "<설영웅수시영웅>은 무협 드라마가 아니라 강호 드라마다"라고 답했다는 글을 보고 더욱 기대하게 됐다. 무협과 강호의 정의는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나라면 단순한 싸움보다는 강호의 의기와 그 속의 아픔을 보여주는 걸 더 선호하기에 '강호 드라마'가 좋다.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스포방지용 금풍세우루 전경 (출처: WeTV)

<설영웅수시영웅>은 총 39부작이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는 18부까지 방송했다. (우리나라엔 아직 12부) 주인공은 <의천도룡기>의 증순희, <장가행> (그리고 잇따라 <안락전>에도 나올) 유우녕, <장야2>에 나온 양초월이고, <유성호접검>, <천애명월도>의 진초하가 특별 출연한다. 진초하 특별 출연이란 말부터 이미 스포이긴 한데, 다행히 18편까지는 나오니까 안심하자.

무협, 그리고 강호

감독이 "무협 드라마가 아니다"라고 했다지만, 무공씬은 볼만하다. 주연급인 증순희, 진초하는 물론이고 조연들 역시 무술 연기가 뛰어난 데다 연출도 좋다. 유우녕의 어색한 무술 포즈가 아쉽지만 모두가 잘 할 순 없겠지.

고수포에서 처음 만난 삼형제 (출처: 텐센트 유튜브)

소몽침이 처음 만난 왕소석과 백수비를 데리고 육분반당과 결판을 짓는 장면의 분위기는, 어쩐지 <장야>의 조소수와 영결의 춘풍정 싸움을 연상하게 한다. 물론 춘풍정 쪽은 짧고 굵은 싸움인데 반해 소몽침의 움직임은 굵직한 비무보다는 기세 싸움에 가깝긴 하다. 특히 문앞을 지키던 왕소석이 삿갓인을 만났을 때 서로 초식 한 번 주고받지 않고 기세만 다투다 끝내는 장면이 압권이다. 삿갓인이 누군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는데, 시청자들 의견을 보니 뒤에 나올 방응간인듯 하다. 뇌손이 "그 검이 오지 않아서 아쉽군. 그랬다면 소몽침이 여길 벗어나지 못했을 텐데"라고 한 걸 봐서 유명한 검을 가진 사람이고 영웅 노래에 오른 유명한 검 중 하나가 방응간이 가진 혈하검이기 때문이다.

왕소석과 삿갓인의 기세 싸움

감독이 강조한 "강호"도 잘 드러난다. 오래된 무협 소설 기반이라 <설중한도행>에서처럼 초인급 무술은 나오지 않고 <차시천하>처럼 무공 고수 한 명이 천군만마 속에서 혼자 대장을 잡는 일 같은 것도 없다. 게다가 천하 무림을 양분하는 '금풍세우루'의 주인 소몽침이, 황제도 아니고 고작 형부 상서 앞에서 절절매는 정도이고(물론 인질 때문이긴 하지만), 형부의 눈밖에 난 주인공 왕소석과 백수비는 소몽침이 돌아올 때까지 경성에서 변변한 직업 하나 못 얻고 고생한다. 어찌보면 너무 인간적인 수준이라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강호'는 '우리가 더불어 사는 바로 이곳'이라 할 수 있으니 현실적인 강호의 모습을 그린 셈이다.
금풍세우루와 육분반당이 경성 거리를 양분해 자기네 세력권 상인들을 돕고, 남의 세력권에는 넘어갈 수도 없다는 설명을 들으면 이게 강호인지 주먹계인지 모호하지만, 실상 무협 소설에 나오는 도심에서 활동하는 강호 몇몇 조직은 좋게 말하면 호위병, 나쁘게 말하면 조직폭력배에 가깝다는 게 정설 아닌가. '인재강호 신불유기'의 강호는 저 멀리 산속에 숨어 무공을 연마하는 문파보다는 이곳 경성의 주먹계에 더 어울린다. 물론 주인공 쪽인 금풍세우루는 '의기'를 중요시하고, 적인 육분반당은 '이익'을 중요시하므로, 같은 주먹계라도 차이는 있다. 금풍세우루라는 이름은 대충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의미라고 드라마에 나왔고(솔직히 말해 정확한 설명이 기억이 안 난다), 육분반당이란 이름은 '상인들이 수입의 35%를 바치고 문제가 생기면 육분반당이 65%(=육분반)의 힘을 쏟아 도와준다'는 의미라고 원작 소설에 나온다.
감독이 그리겠다는 강호란 그럼, 이런 현실적인 주먹계 이야기 뿐인가? 하면 그렇진 않다.
젊은 시절 미천맹의 관칠을 잡으러 갔던 분하창 옥 부자는 이미 강호에서 은퇴한 데다 눈이 먼 부인 차화와 함께 평화롭게 살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풀려난 관칠이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이자 들보에 숨겨뒀던 창을 다시 꺼내 관칠을 막으러 갔다. 옥 부자 본인도 이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차화도 남편이 한 번 가면 돌아오지 못 한다는 걸 알지만, 옥 부자는 가기로 결심했고 차화도 보내주기로 결심했다. 가지 않으면, 보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하며 살 거란 걸 알기에. 옥 부자의 이런 결정이 곧 진정한 강호인의 결정이 아닐까?

관칠 손에 죽은 옥 부자 (출처: https://weibo.com/1491832997/LvAAd0iAn)

강호엔 선도 악도 없다

소몽침을 죽이고 금풍세우루를 이어받으려는 향주 화무착은 처음 나올 땐 악인 같지만 알고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오래전 육분반당이 금풍세우루에 심은 세작이었던 그는 비록 금풍세우루를 위해 열심히 일해왔지만, 루주인 소차막(소몽침의 아버지이자 금풍세우루 창시자)에게 세작이었다는 사실을 들킨 후 쥐죽은 듯 살아야 했다. 소차막이 죽어가는 마당에 자신이 세작이었다는 증거를 없애 당당하게 그간 노력한 결실을 얻으려는 게 그의 목표다. 물론 주인공이 아니어서 소몽침에게 패배하지만, 패배를 시인하고 깔끔하게 물러나는는 것이나 자신을 꺾는데 힘을 보탠 왕소석을 원망하지 않는 것을 보면 속이 나쁜 인물은 아닌 것 같다.

화무착과 뇌손. 악인이되 악인이 아니다. 연기마저 흠잡을 데 없다. (출처: WeTV)

육분반당은 금풍세우루의 적이긴 하지만, 이곳 인물들도 악 일변도가 아니다.
총당주 뇌손은 나라를 팔아먹는 짓을 하는 유교집단(有橋. 공자의 유교가 아님에 유의하자)에 발을 담근 후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처럼 빠져나가지 못하고 계속 그 일을 맡아야만 했다. 그럼에도 유교집단의 명을 어기면서까지 미천맹의 성주 관칠을 죽이지 않고 가둬두기만 했다. 제 처남이란 이유로. 나중에 관칠이 죽자 죽은 아내의 무덤을 찾아가 사과하기도 했다. 나라 팔아 먹는 일을 하는 건 사실이고 잔혹하기도 하지만, 말 안 듣는 딸에게도 화낸 적 한 번 없고 딱히 위세를 부리지도 않는 스타일이다.
뇌손 다음 가는 대당주 적비경. “경성에서 친구가 없으면 적비경을 찾으라. 그가 네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는 우아하고 다정한 적비경은 어렸을 때 뇌손의 아내에게 구함받은 후 내내 육분반당을 위해 일했다. 소몽침이 인정하는 '육분반당에서 생각이 있는 유일한 사람'인 적비경은 이성적이어서 다소 호전적인 뇌손과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다.
조정과 강호가 모두 연관된 유교 조직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형부상서 부종서는 악인인 건 확실한데, 밉긴 하지만 크게 위협이 되지 않기 때문에 되레 귀엽게 느껴진다. 아마 나중에 나오는 채경이 조정 쪽 최대 적이고 부종서는 일개 수하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 채경이 뜬금없이 왕소석과 안면을 튼 걸 보면 언젠가 이 친분을 이용하는 장면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진짜 악인이 될 것 같은 사람은 육분반당 쪽이 아니라 주인공 쪽일 것 같다. 주인공인 왕소석과 백수비는 소몽침과 결의형제를 맺고 금풍세우루에 들어갔고, 백수비는 '부루주'라는 전에 없던 직함까지 달게 됐다. 소몽침이 오만하고 명성을 날리기를 원했던 백수비의 성격을 고려하고, 자신이 죽은 후 금풍세우루를 맡길 사람이 필요해서 결정했을 것이다. 그런데 백수비는 첫 눈에 반한 뇌순이 사실은 소몽침의 예전 약혼녀고, 소몽침을 위해 자신의 그림을 샀다는 걸 알고 나서 괴로워하더니, "부루주이긴 하지만 허울좋은 이름뿐 실권은 하나도 없으니 나와 다를 게 없다"는 신통후 방응간의 도발에 흔들린다. 도발에 넘어간 백수비는 소몽침 몰래 금풍세우루 사람을 동원해 방응간이 알려준 화약이 있는 곳으로 달려들 모양인데, 방응간이 사실대로 말했는지 아닌지 아직 알 수가 없다. 방응간은 양쪽을 싸움붙이는 게 목적이라 제대로 알려준 것 같기도 하지만....

백수비를 도발하는 방응간

백수비를 흑화시키는 방응간은 혈하신검으로 유명한 방가음의 양자로, 방가음이 실종된 후 혈하신검을 들고 조정으로 돌아와서 의부의 작위인 신통후를 이어받았지만, 유교 집단의 견제를 받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인형처럼 살아왔다. 이건 본인 주장이라 100% 진실인지는 모르겠다. 일단, 견제를 받아서 무공을 하나도 익히지 못했다는 말은 거짓이다. (왕소석이랑 지붕에서 한 번 겨루기도 했는데, 금풍세우루가 저 말을 믿는 는 건 드라마의 오류 같다) 아무튼 방가음이 의부라고 하지만, 조정에 와서 다시 의부를 만든 듯하다. 그가 늘 찾아갔다 거절당하는두 번째 의부는 바로 승상 채경이다. (18부까지는 아직 채경이라고 명확히 나오진 않았지만, 서예에 빼어나고 원십삼한이 지키는 걸 봐서는 채경이 분명하다) 채경은 유교집단의 수장일 것 같은데, 방응간이 채경을 쓰러뜨리고 유교집단을 얻을지, 아니면 채경과 손 잡고 그 자리를 이을지는 두고봐야겠다.

방응간. 성공한 이후의 모습 같다 (출처: 설명웅수시영웅 웨이보)

병신같지만 멋져

<설영웅수시영웅>을 보다보면 이런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 감탄사의 대표 주자가 소몽침. 여기서 "병약하지만 무공은 빼어난 소 루주"를 다시 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청설루>가 오래전 온서안이 평가를 맡았던 무협 잡지 <금고전기 무협편> 당선작인 걸 생각하면, 금풍세우루의 영향을 안 받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이번의 병약하지만 강한 소 루주는 우아한 서생같은 소억정과는 달리 상당히 강렬하고 오만한 사나이다. (일단 각 역을 맡은 배우의 인상부터 다르다)

뭔가 부끄럽지만 멋진 소몽침 모음

어렸을 때 거란 고수에게서 달아나다가 장법에 맞아 허약해졌지만, 홍수신니의 진전을 이어받고 발전시켜 "몽침홍수제일도"라 불리게 됐고 혼자서 육분반당 사대법왕과 싸워 유명해졌다. 아버지 소차막이 병을 앓자, 거란에서 돌아오는 와중에 고수포에서 화무착이 보낸 부하 및 육분반당 인물들과 싸우는데, 이때 하는 대사가 마디마디 주옥같다. 왕소석을 시켜 화무착을 유인하고, 자기는 백수비의 도움을 받아 아버지를 만나러 금풍세우루로 가면서, "아버지가 와병 중이시니 몸에 피를 묻히고 만날 수 없다"며 백수비에게 모든 싸움을 넘기며 유유히 싸움터를 걸어가는 것도 주옥같은 명장면이다. 나중에 왕소석과 백수비가 핍박을 이기지 못해 경성을 떠나려 할 때 찾아와서 의형제를 맺자며 하는 말도 마구 오글거리면서도 멋있다.

와병 중인 아버지께 피를 묻히고 찾아갈 수 없다! 난투 속에서 뒷짐지고 걷는 소몽침

소몽침, 왕소석, 백수비의 고수포 싸움이나 결의형제 장면은 고룡식 우정을 떠올리게 하고 옛 무협의 향수를 물씬 풍긴다. 천룡팔부 삼형제 다음에 이처럼 가슴 웅장한 삼형제의 결의가 또 있었던가! 천룡팔부 삼형제도 단예가 소봉 몰래 제멋대로 맺은 거지 이런 식으로 의기투합한 건 아니었다. 물론 뒤로 갈수록 소몽침 삼형제 사이에 분열 조짐이 보이지만, 결의 장면을 볼 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처럼 옛날식 의리 무협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강추할만 한 드라마다.

의형제 하자! 결의하는데 이유가 어딨어, 내 형제는 둘! 너랑 너!

색다른 여성 캐릭터

여주인공 온유는 소몽침의 사매이자 낙양왕의 딸이다. 무공은 좀 떨어지는 편이지만 집안 덕분에 왠만한 사람들이 못 건드린다. 처음 나올 땐 중국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말괄량이에 제멋대로인 여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갈수록 사랑스럽다. 온유는 왕소석이 방응간의 계략에 넘어가 관칠에게 붙잡혔을 때 왕소석의 소식을 듣기 위해 방응간이 하라는 대로 여자 씨름에 나가게 됐다. 처음엔 마구 넘어지고 뒹구는 등 온갖 수난을 겪지만 왕소석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일어나고 또 일어난다. 보통 이런 건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러 온 남자가 하는 역할인데, <설영웅수시영웅>에서는 여자인 온유가 해냈다. 게다가 형부 관아 부근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진 왕소석을 업고 금풍세우루까지 데려가는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온유 역을 맡은 양초월은 가녀리디 가녀린 배우인데 거구인 증순희를 번쩍 업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눈치채지 못한 그래픽이라도 있었을까?) "홍수신니의 관문 제자, 낙양왕의 딸, 금풍세우루 소몽침의 사매, 한산의 제비, 다 필요없으니까 네가 좀 가벼워졌으면"이란 말에 빵 터지면서도(사실 웃긴 대사는 아닌데....) 온유가 왕소석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왕소석을 생각하며 힘 내는 온유
왕소석을 업고 가는 온유 (앞 부분만)

삼화루의 주소요는 어린 시절 기루에 팔렸다가 미천맹 관칠의 도움으로 그곳을 벗어나 강호에 뛰어들었다. 미천맹이 무너진 후 금풍세우루에 들어와 소몽침의 비밀 호위로서 기녀로 가장해 지내고 있었는데, 관칠이 풀려난 후 금풍세우루와 육분반당이 힘을 합쳐 그를 붙잡으려 하자 다친 그를 빼돌려 달아났다. 기녀 노릇할 때도 귀여워서 마음에 들었는데, 지난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녀야말로 의리가 뭔지 아는 사람인 걸 알게 됐다. 주소요는 관칠의 도움을 잊지 않고 관칠이 죽은 후 그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살아왔다. 나중에 관칠이 살아 있다는 걸 알자 두 사람이 멀리 떠나 행복하게 살게 해주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관칠은 백수비에게 목숨을 잃어 다시는 아들을 보지 못하게 됐다. 주소요가 금풍세루루를 찾아가 배신한 죄를 청하자 소몽침은 규칙에 따라 그녀를 쫓아내면서도 쫓겨나는 길에 몽둥이 찜질을 대신 받아주고 "너는 이제 금풍세우루 사람은 아니지만 언제까지나 내 친구다"고 격려해준다. (소몽침의 대사는 하나같이 주옥같다)

주소요 (출처: https://www.163.com/dy/article/H8AGB2TI05534KMV.html)

온유와 주소요를 보면 이 작품이 여성 캐릭터도 평면적으로 그리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 하나 하나가 다 자기만의 이야기를 갖고 입장에 따라 행동하는데, 이런 점이 이야기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같다. 인물에게 서사가 있는 건 원작이 시리즈를 이루는 대작이라 그렇다. 비록 원작 내용을 여기저기 짜깁기 했지만 아무래도 세계관이란 게 있으니까.
육분반당 삼당주 뇌미도 나중이 기대되는 인물이긴 하다. 뇌손이 강남 벽력당을 차지하면서 벽력당 당주의 딸인 듯한 뇌미는 육분반당에 들어와 3인자의 자리를 차지했고 심지어 뇌손의 침대까지 차지했지만, 그게 정말 원해서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때 뇌미가 백수비에게 "억지로 이곳에 남아 친구에게 손해만 끼칠 바에야 떠나는 게 낫지"라고 도발한 적이 있었는데, 그후 부루주가 된 백수비가 뇌미에게 "내 기적은 뭔가를 거절한 결과지 얻은 결과가 아니다. 당신도 누군가가 주는 기회를 거절할 수 있으면 좋겠군"이라고 하자 뇌미도 약간 흔들린다. 뇌미의 벽력당이 육분반당에서 돌아설지 말지도 궁금한 뒷 얘기다. 뇌미는 백수비와 자꾸 얽히는데, 원작대로 간다면 백수비와 약혼하게 될 것이다.

뇌미가 경성의 고급 술집이라며 백수비를 데려온 곳. 옛날에 이런 바가... (출처: WeTV)

물론 허점도 있다

하지만 좋은 가문 출신도 아니고, 먹고 살려고 온갖 일을 해왔던 백수비가 그림도 잘 그려, 피리도 잘 불어, 못 하는 게 하나도 없는 건 좀 과한 설정이 아닐까? (근데 이건 원작의 백수비도 마찬가지다) 왕소석의 설정도 그렇다. 약초를 잘 아는 건 천의거사의 제자니까 그렇다쳐도, 산골에 살던 사람이 피리도 잘 불고 채경의 눈에 들 서예까지 갖췄다니. 그리고 왕소석과 백수비가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형부에서 마구잡이로 잡아 가둔 부분은 황당할 정도다.
백수비가 몹시 오만하고 야심만만하다는 건 드라마 내내 언급되지만, 그래도 그동안 왕소석과의 우정, 소몽침과의 의기 등 좋은 모습만 보여줘놓고 갑자기 돌아서게 만든 서사도 어딘지 공감하기 힘들다. 그가 소몽침에게 불만을 품게 된 계기가 뇌순인데, 애초에 뇌순은 약혼한 적 있다고 말했었고, 또 백수비 자신조차 뇌순이 자기에게 관심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새삼스레 그 대상이 소몽침이라서 화가 나신단다. 한 것도 없이 의형제 덕에 부루주가 된 걸 고마워하진 못할 망정 (심지어 백수비가 부루주가 된 걸 불만스러워하던 경력 오래된 주사들도 육분반당의 도발에 거의 넘어가지 않았는데) 명목만 주고 실권이 없어서 싫으시단다. 물론 드라마를 끝까지 보고 나면 백수비를 좀 더 이해할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천맹 관칠은 8년이나 우물 옆 동굴에 갇혀 있었다. 뇌손이 목숨을 붙여주긴 했지만 힘을 유지할 만큼 좋은 음식을 주지 않았을 텐데 우물에서 벗어나자마자 예전 못지 않은 무공을 선보이는 것은 지나쳤다. 물론 최전성기 때 수십명이 포위해서 많은 사람이 죽고 겨우 잡았다고 했는데, 이번엔 다섯 명이 포위해서 딱히 다친 사람도 없이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으니 예전과 똑같다고 할 수는 없겠지. 아무리 그래도 8년 간 묶여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운동도 제대로 못한 사람이 풀려나는 순간 활개를 칠 수 있다니. 저럴 가능성이 있다면 잡았을 때 무공을 폐하면 될 걸 왜 위험하게 그냥 뒀을까?

풀려난 후 복수하러 온 관칠. 8년 만에 해를 봤는데 너무 멀쩡하다.

이처럼 서사에서 때때로 허술한 구석을 드러내니, 꼭꼭 맞아떨어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난 몇 군데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땐 이야기가 세밀하다고 생각한다. 요즘 본 다른 드라마처럼 몇 달 사이 이야기를 줄거리처럼 보여주거나 별로 연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를 번갈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한 사건을 치밀하게 다루고 거기서 이어지는 새로운 사건을 다시 다루는 식이어서 훨씬 긴장감이 있다.

영웅을 말하다

드라마의 시작은 왕소석이 강호에 뛰어든지 10년이 지난 시점이다. 시작 부분부터 강력한 스포를 하는데, 이게 또 드라마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해서 꼼꼼히 보고 넘어가야겠다.

영웅을 노래하는 설서인을 만난 세 친구

1부 마지막에서 왕소석, 백수비, 온유는 설서인이 부르는 영웅 노래를 듣게 된다. 이때 온유가 설서인에게 "내 친구들도 나중에 영웅이 될 테니까 노래에 넣어주세요"라고 부탁하는데, 그때의 노래와 첫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를 비교하면 확실히 가사가 늘어났다.

검 한 자루로 정의를 붙잡고(挽) 칼 한 자루로 그리움을 남기니(留),
비바람에 사람은 의구하건만 먼 길 언제쯤 돌아갈꼬.

왕소석이 쓰는 만류검을 의미하는 구절이니 왕소석이 영웅 노래에 들어간 셈이다. 뒷 구절은 백수비를 의미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개인적으론 전혀 연상이 안 된다.
왕소석이 설서인의 노래 앞구절을 듣고 "그 노래에 나온 사람 중 몇몇은 내 친구고 몇몇은 내 적이었지요. 이젠 모두 재가 되어 흩어졌습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면 노래에 나온 영웅들은 그 시점에 모두 죽었다는 말이다. 그 영웅들이 누군고 하면,

홍수도, 강를 끊고 (소몽침)
쾌만결, 강산의 육분을 차지했구나 (뇌손)
사해 조각배에 신룡이 고개를 숙이니, 세찬 파도 출렁이네. (적비경. 별호 신룡저수)
청삼준모에 속임이 없으니, 검이 악의 없는 이를 보살피노라. (양무사. 이름 풀이가 '악의 없음')
삶과 죽음 열세 판이니 (원십삼한)
피의 강도 응당 웃으며 진저 (방응간, 이름 풀이가 '응당 보다')

"청삼준모에~" 노래하는 설서인에게 따봉 날리는 양무사 (출처: WeTV)

설서인이 왕소석에게 "그 함에 든 사람은 친구인가, 적인가?"고 묻자 왕소석은 "내 평생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다. 혹시 온유일까? 그렇다면 왕소석이 연을 맺은 사람은 다 죽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설영웅수시영웅>이 강호를 그리기로 했다면, 이런 결말도 크게 이상하진 않다.
왕소석은 마지막으로 설서인에게 노래 제목을 물었는데, 그 제목이 바로 '설영웅' 즉, <영웅을 말하다>다.
영웅을 말하다. 과연 누가 영웅인가?
끝으로, 오프닝곡이 마음에 들어서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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