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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미디어/영화와 드라마

비슷하면서도 다른 <소년가행>

by 와룡 2023. 6. 6.

소년가행 포스터 (출처: 바이두 백과)

최근 들어 딱히 유명한 드라마 소식이 들리지 않아서, 요즘엔 뭘 방송하나 싶어 이것저것 둘러봤다. 한 서너 가지를 살펴봤는데 전부 1편도 채 못 보고 그만뒀지만, 유일하게 <소년가행>만 끝까지 봤다. 아마 무협이라는 기본 틀에 매력적인 캐릭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불어 로맨스 비중이 거의 없는 점도 내 취향이었는데, 어쩌면 그 점 때문에 인기가 조금 덜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년가행>은 가상의 나라인 북리 명덕제 시절, 조정과 강호를 넘나드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조정에선

그 시절 조정은 명덕제의 아들 중에 가장 뛰어난 여섯째 영안왕 소초하가 사라진 후 백왕과 적왕(이름 참 막 지었다)이 황위를 다투는 상황이다. 명덕제의 아우이자, 명덕제가 즉위할 때 큰 공을 세운 랑야왕이 모반 혐의로 심문당하고 자결한 뒤 그 제자였던 소초하는 랑야왕의 혐의를 벗기기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아버지의 미움을 사 평민으로 강등돼 쫓겨났고 한동안 소식이 끊겼다.

강호에선

강호에서는 중원인들 입장에서 마교라고 부르는 외지의 천외천이 쳐들어왔다가 대패하고 종주인 엽정지가 죽으면서, 12년의 평화를 대가로 아들 영안세를 중원에 인질로 남겨두게 됐다. 12년의 기한이 차자 천외천이 영안세를 데리러 오고, 중원 무림은 영안세를 숨기거나 죽이거나 각자 원하는 바를 노리고 몰려들었다. 당시 강호에서는 설월성이 가장 큰 세력을 차지한 상태고, 본래 강호 일인자였던 무쌍성은 빼어난 후기지수 무쌍의 등장으로 1위 탈환을 노리고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들

이런 상황에서 뇌문의 제자 뇌무걸은 배움을 얻으러 동맹인 설월성(설월성은 뇌문 및 당문과 손을 잡고 그곳 제자를 받아들여 무공을 가르쳐 줌)에 가다가 우연히 설락산장에서 행패를 부리는 자들을 처단하면서 그곳 주인 소슬과 만난다. 첫 장면을 보면 뇌무걸이 주인공 같은데, 물론 주인공 중 한 명이긴 하지만 비중이 가장 큰 사람은 소슬이다. 주인공 중에서 가장 임팩트 강한 사람은 무심이다. 포스터를 봐도 소슬이 중심, 그다음이 무심이라, 뇌무걸은 캐릭터성은 딱 무협 진주인공인데도 3순위 주인공이다. (네 번째로 나오는 사공천락은 그냥 성별을 맞추기 위한 배치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로 딱히 비중이 없다)
내 마음에 든 캐릭터는 소슬과 무심. 당련이다. 무협 주인공은 보통 내 취향이 아닌데, 소슬은 도무지 무협 주인공 같지 않은 초반 설정이 마음에 들었고, 가진 이야기도 좋고, 배우와 딱 떨어지는 무심하고 나른한 스타일도 좋았다. 무심은... 초반부터 초고수로 나오는 데다 세상 꺼릴 것 없는 성품과 포부 넘치게 시를 읊는 장면만으로도 비중을 떠나서 그냥 좋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련. 얘는 나중에 이야기하자.
젊은이들 외에 강호 고수와 조정 신하들 중에도 매력적인 사람이 많다. 등장인물이 꽤 많은데도 각자 매력과 스토리가 있다는 점이 이 드라마가 재미있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스포일러에 주의하세요.

춥디추운 천외천의 모습. 스포방지용 (출처: 유쿠 YouTube 채널)

조정과 강호는 각자 처한 갈등이 있지만, 가장 큰 이야기에는 양측 모두 연결점이 있다. 첫 번째 연결점은 랑야왕이다. 랑야왕이 건재할 때 천계성에는 사방신의 이름을 딴 수호자 넷이 있었는데 모두 강호인이었다. 랑야왕이 죽은 후 그들도 신분을 숨기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지만, 랑야왕의 명에 따라 영안왕 소초하를 지키기로 했기에 음으로 양으로 소초하를 돕는다. 두 번째 연결점은 천외천이다. 12년 전에 천외천의 종주 엽정지가 쳐들어온 건 사실 빼앗긴 부인을 되찾기 위해서였는데, 그 부인이 바로 명덕제의 후궁인 선비다. 이 두 가지 때문에 강호인들이 계속해서 북리의 수도인 천계성을 찾게 된다.

어차피 모두가 아는 소초하의 정체

영안왕 소초하. 최연소에 소요선경에 이른 불세출의 기재. 그는 당연히 주인공인 소슬이다. 어차피 강호 전대 고수며 조정 신하들은 얼굴만 봐도 다 아는 사실이고, 본인도 굳이 부인하지 않고 숨기지도 않으니 비밀이라도 할 수도 없다. 쫓겨난 후 알 수 없는 자의 손에 무공을 잃어, 오직 내공 없이 펼칠 수 있는 신법만 사용해 위험한 싸움을 피할 뿐, 중반부까지는 거의 싸움을 하지 못한다. 이 점은 <설중한도행>과 비슷한데, 서봉년과 다른 점이라면 먼저 시비를 걸거나 싸움의 원인이 되는 일이 없으며, 적의 최종 목표가 아닐 때도 많아서 얼마든지 달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싸우는 소슬. 당연히 우리 팀이 다 쓰러진 다음에 싸워야 제 맛

소슬의 목적은 랑야왕의 억울함을 밝히는 것이다. 그걸 위해서 무공도 되찾고, 돈도 모으려고 한다. 물론 그가 먼저 찾아가지 않아도 천계성에서 가만있지 않았다. 한때 황위를 계승자나 마찬가지였고 명덕제가 뒤늦게 그를 다시 데려와 황자의 신분을 돌려주려고까지 하니, 경쟁자들이 방해하려고 하는 건 당연하니까. 소초하는 "천계성에 돌아오면 지난 과오를 용서하고 신분을 되돌려주겠다"는 아버지의 전갈에 "내게 무슨 죄가 있는가"라며 끝내 랑야왕의 억울함을 밝히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광의가 연기를 잘하는 것 같진 않지만, 캐릭터가 워낙 잘 맞아떨어져서 몇 장면이 기억에 깊이 남았는데 그중 하나가 이 장면이다.

돌아오면 죄를 용서하겠다는 황제의 전갈을 듣고 죄가 없다고 하는 소슬

아버지의 화해의 손길을 거부한 소초하는 랑야왕 수호자들의 도움, 랑야왕을 존경했던 강호인들의 호의로 서서히 무공을 되찾고, 부모의 뒤를 이은 젊은 4대 수호자를 얻어 결국 천계성으로 간다.

천계성 사대 수호자

동방신 청룡은 검심총 후계자 이심월이다. 뇌문의 뇌몽살과 결혼해서 설월검선 이한의와 뇌무걸을 낳았는데, 이한의는 조정일에 나섰다가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의 삶을 따르기 싫어서 청룡을 이어받는 걸 거부했지만, 동생 뇌무걸이 어머니와 같은 수호의 검이라는 걸 알자 청룡패를 넘겼다. 2대 청룡 뇌무걸은 뇌문의 무공과 벽력탄, 이한의의 검술에 무심의 복마권(인지 뭔지 아무튼 마음대로 지은 이름)을 바탕으로, 주인공 삼인방 중에서는 가장 무공이 약하지만, 천진난만하고 의리가 넘치고 포기를 모르는 남자(정대만...?)다. 갑자기 초고수가 되진 않지만 차츰차츰 실력을 쌓아 올라가는 스타일. 어차피 부모와 누나를 볼 때 자질이 부족하진 않을 것 같다.

청룡으로서 첫 싸움에 나선 뇌무걸. 일부러 파란 옷을 입었다.

남방신 주작은 설월성 3성주, 창선 사공장풍이다. 제일 먼저 소슬이 누군지 알아보고 그를 돕기 위해서 억지로 제자로 삼은 데다 유검선에게 소슬의 상태에 도움이 되는 무공을 얻어주기도 했다. 그 딸 사공천락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보호할 순 없다며 주작을 이어받는 걸 거부했지만, 좋아하는 소슬이 바로 소초하라는 걸 알자 자연히 그 자리를 받아들였다. 소슬의 연인 포지션인데 두 사람의 로맨스가 거의 없는 데다 활약하는 장면도 딱히 없다.

주작으로서 첫 싸움에 나선 사공천락. 일부러 빨간 옷을 입었다.

북방신 현무는 당문의 당련월. 딱 봐도 검은 옷을 입고 다니니까 이들일 거라고 예상은 했다. 당련월은 이미 오래전부터 제자인 당련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고 했고, 당련은 사부의 사명을 잊지 않고 만나야 할 사람, 즉 소초하를 기다려왔다. 항상 사명에만 집중하며 살아온 당련에겐 '마음이 가는 대로 하라'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 하지만 소슬, 뇌무걸과 함께 모험을 겪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어서, 당련월이 현무 자리를 물려줄 때 망설이지 않고 이어받았고, 사방 수호자 중에 제일 먼저 희생되었다. 당련이 평소 스타일을 벗어던지고, 백리동군에게 배운 취권(? 이름을 잊었음)을 펼치면서 암살단인 암하와 결전을 벌이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다. 당련을 좋아한 시청자로서 이 장면에서 수없이 비명을 질렀는데, 그 비명이 또 다른 의미로 바뀔 줄은 몰랐다. 그 싸움에서 뇌무걸이 그나마 말이 통하는 무쌍성을 상대하고, 사공천락은 군대와 붙었지만 나중에 군대를 끌고 온 엽약의 덕분에 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고, 백호 쪽은 애초에 싸울 생각 없는 낙청양과 마주친 것에 비하면, 당련은 혼자서 그 독하다는 암하의 정예와 마주쳤는데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다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암하는 심지어 이한의와 조옥진이라는 두 검선을 상대하고도 완패하지 않을 만큼 강력한 상대인데. 설마 사방신이 모이자마자 한 사람이 죽진 않겠지, 하고 마음 졸이며 봤는데 정말 죽은 게 맞다. 즉 2대 현무 당련은 영안왕 소초하가 천계성에 들어가는 걸 보지도 못하고 제일 먼저 죽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다 살릴 거면 그냥 살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현무로서 첫 싸움에 나선 당련. 얜 원래 검은 옷을 입는다.
술로 싸우다가 죽는 당련

서방신 백호는 제일 뒤에 나오고 힌트도 거의 없다. 바로 백효당의 희약봉이다. 백효당은 강호 고수 순위를 매기는 곳으로 그 주인을 백효생이라고 부른다(맞다, 다정검객무정검의 그 백효생). 희약봉은 다친 몸으로 폐관 수련하느라 백호 자리를 딸 희설에게 물려줬고, 희설은 주로 백효당의 정보력을 이용해 소초하를 돕는다. 사공천락과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면 본래는 소슬, 사공천락과 삼각관계인지도 모르지만, 드라마에서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백호의 첫 등장. 왼쪽은 창선 사공장풍이다.

무심, 그는 주인공인가 아닌가

천외천 소종주 영안세. 한수사 망우대사의 제자 무심. <소년가행>의 초반 이야기는 바로 이 무심이 어쩌다가 관에 들어가 운반 중인지, 결국 그가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지에 관한 이야기다. 무심은 항상 웃으며 근심걱정 없는 사람처럼 구는데, 이때문에 스님이면서도 어딘지 요사한 느낌을 풍긴다. 그 요사한 매력을 배우가 참 잘 살렸다. 

떠나는 스승의 환영을 보며 우는 무심

원치 않은 인질의 삶이었지만 스승인 망우대사에게 많은 것을 배웠기에, 자신의 고향은 한수사라고 생각해 중원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결국 마음을 돌려 제발로 천외천으로 갔다. 한수사에서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제사를 올린 뒤 "이제 네 길을 가라"는 스승의 환영을 보고 울부짖는 것을 보면, 비록 겉으로는 근심걱정 없는 척하지만 그에게도 아픔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스승의 말대로 제 갈 길을 가기로 했을 때, 소슬과 뇌무걸이 '너 혼자 가는 게 아니다. 우리도 함께 하겠다'고 하면서 세 사람의 삼형제 구도가 만들어졌다. 대놓고 의를 맺지는 않았지만 내눈엔 딱 의형제 세 명이었다. 

그 길, 우리가 함께 가겠다!

안타깝게도 천외천으로 떠나면서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소슬은 결정에 어려움이 있을 때 꿈에서 무심을 볼 정도로 그를 의지했고, 나중에 소슬이 위험에 처하자 도우러 달려오기도 했다. 더구나 소슬에게 심마인까지 가르쳐줘서 중요한 시점에 써먹을 수 있게 했으니 어떻게 보면 소슬에겐 대사형 내지 반쯤 스승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뿐일까. 천외천으로 가기 전에 소슬과 뇌무걸에게 무공을 가르쳐준 뒤 큰 소리로 시 한 수를 읊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주제나 마찬가지다. 나중에 주인공들의 대사에도 나오지만, '소년(少年)의 의기'가 그것. 그래서 제목이 소년가행이다. 여기서 소년은 우리 말과는 조금 다르게 막 세상에 나온 파릇파릇한 젊은이에 가깝다. 다만 저 말을 할 때 얼굴이 못 생기면 '소년'이 아니라 그냥 '젊은이'라는 대사가 있으니, 단순히 '젊은이'라고 옮기기는 조금 뭣하긴 하다.

아무튼 무심이 읊은 호방한 시 한 편이 갓 세상에 나와 두려울 것 없고 더럽혀진 데 없는 시원시원한 소년의 의기를 충분히 드러내줬으니, 과연 그를 주인공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초중반까지는 대체 무심이 주인공인지, 소슬이 주인공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만큼 줄거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데 한동안 안 나오는 데다 후반부에는 꼭두각시가 되기 때문에 그 매력을 자주 볼 수 없어서 아쉽다.

꼭두각시가 된 무심

비슷한 듯 다른

기본적으로 이 작품은 오마주랄까 차용 같은 게 많다. 내용이나 설정도 여기저기서 본 것들이 많고.
예를 들면, 백효생은 아예 <다정검객무정검>에서 따왔고, 검술에서 최고 경지에 이른 낙청양의 이름은 <소오강호>의 풍청양을 떠올리게 한다. 신의라는 화금은 약왕곡 출신인 데다 사저인 귀의 야아는 문파를 배신했고, 칠심해당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딱 <비호외전>이다. 주인공이 무공을 못하지만 신법 하나로 잘 피해다니는 건 <천룡팔부>의 단예 설정이다.

백효당에서 발표하는 고수 순위.

꼭 신무협하고만 공통점이 있는 것만도 아니다. 누구나 보고 '앗'했을 단어, '랑야'. 랑야왕이 공을 세운 형제를 꺼린 황제 손에 반란 음모를 뒤집어쓰고 죽은 건 <랑야방>의 임섭과 비슷하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워낙 많으니 그렇다 치자.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그 황제인 명덕제 역할을 드라마 <랑야방>에서 양제를 맡았던 정용대에게 맡겼다. <랑야방>에서는 끝내 물러서지 않다가 혼쭐난 양제가, <소년가행>에서는 잘못을 인정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아무리 봐도 오마주다.
뇌무걸의 외가는 검심총이고, 어머니는 그곳 후계자였다. 이건 <설중한도행> 서봉년의 어머니가 검총 출신인 것과 비슷하다. 어쩌면 요즘 무협 소설이 다 그런지 몰라도, 무공의 단계가 있는 것도 비슷하며, 커다란 검집에 칼을 여러 개 넣고 비검처럼 쓰는 것(<설중한도행>의 검구황과 <소년가행>의 무쌍)도 닮았다. <설중한도행>과 <소년가행>이 설정상 꽤 비슷한 건 이미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마침 두 작품이 몇 년 사이에 드라마화되기도 했고. 아무래도 작가의 인기도나 원작 소설 평가 때문에 <설중한도행>이 훨씬 인기가 있어서 출연 배우의 급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설중한도행>이 높지만, 개인적으로는 <소년가행>이 훨씬 재미있다. <설중한도행>과는 달리 <소년가행>은 원작을 거의 따랐다고 하니 원작 소설도 재미있을 것 같다.
물론, 기존 무협 소설과 다른 점도 있다. 가장 큰 게 바로 주인공이 마지막에 황위를 잇지 않는 엔딩 장면이다. 어느 정도 보다 보니 황제가 안 될 거 같다는 느낌은 왔다. 소슬은 애초에 황제가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었고, 나라를 바꾸겠다는 결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런 건 백왕이 잘 맞아보였다. 아주 아주 어린 시절에 봤던, <마법진 구루구루>라는 애니메이션이 생각난다. 마왕을 물리치려고 용사와 마법사가 모험을 하다가, 마왕성 앞에서 '마왕을 물리치면 모험이 끝나잖아'하면서, 돌아서서 계속 모험하러 떠나는 엔딩이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그 엔딩이 내겐 꽤 색달랐나 보다. 그걸 봤기에 <소년가행>의 엔딩이 화들짝 놀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색달랐다. 그리고 주인공이 목표를 이루는 동안 피 튀는 전투가 없다. 심지어 안타까운 희생도 당련 하나뿐이다. (그럴거면 왜 당련만 죽이냐고요!!)

반란을 일으키러 왔다가 황제의 죄기조에 포효하는 대장군 엽소응

또 다른 점은, 명확한 선악의 대결 구도가 없다. 처음에는 마교라는 천외천이 나쁜 놈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무심이 종주가 되면서 훨씬 온건해졌다. 무쌍성이 설월성을 꺾으려고 해서 뭔가 큰 싸움이라도 있을 줄 알았지만, 비무 정도는 있어도 비열한 싸움은 없었다. 소슬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런 내용에선 황제가 최고 보스로 나오는데, 여기선 그렇지도 않다. 황제는 뒤늦게 아우를 믿어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모두의 앞에서 죄기조(황제가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벌하는 글)를 내렸다. 마지막 적은 적왕인데, 그 구도가 두드러지는 건 소슬이 천계성으로 돌아간 후여서 전체적인 대립 구도라고 보기는 조금 어렵지 않나 싶다.

조정 이야기에서 최대 적인 적왕

주인공 앞에 장애물은 계속 있지만, 한 번 적으로 나타나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고 무작정 악당 짓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심지어 그 밉던 암하조차 마지막에는 폭주하는 가주를 배신하고 평화로운 길을 간다.

사랑 이야기가 전혀 없나?

주인공 커플인 소슬과 사공천락, 뇌무걸과 엽약의는 커플 사이에 방해 요소가 없어서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볼 순 없다. 대신 여러 조연들이 사랑 때문에 움직이는 일이 많다.
가장 큰 사랑 이야기는 바로 설월검선 이한의와 현검선 조옥진. 고전 배경 드라마에서 남녀 주인공이 처음 마주칠 때 "띠리리~"하는 음악과 함께 슬로우모션이 들어가는 건 아주 흔한 장면인데, <소년가행>에서 이 장면은 주인공 커플이 아니라 이한의와 조옥진이 연출했다. 사부의 점괘 때문에 평생 산을 내려갈 수 없는 조옥진은 세 번 째 만날 때는 같이 산을 내려가자고 한 이한의를 기다렸지만, 이한의가 찾아왔을 땐 주화입마에 빠져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십여년이 지나 다시 만나 결혼하려고 했지만 결국 점괘의 결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혼 전에 죽는 조옥진

설월성 1성주 백리동군의 사랑 이야기는 상세히 나오진 않지만, 백리동군이 술을 마시며 시름을 잊으려고 한 건 전부 사랑한 여자의 죽음 때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 빠진 백리동군 + 싸우는 백리동군. 백리동군은 고수 순위 2위다.

막량성의 낙청양이 '처량검'이라는 검법을 익힌 것은, 사랑하던 사매가 두 번이나 결혼했지만 둘 다 자기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슬프고도 우스운 전설도 있다. 그 사매가 바로 선비다. 명덕제의 사랑을 받아 궁에 들어갔지만, 천외천의 종주 엽정지와 사랑에 빠져 달아났고, 아들인 적왕이 아프다는 거짓말에 속아 다시 황궁으로 돌아가는 바람에 천외천이 중원에 쳐들어오는 사건의 시발점이 된 선비.

고검선 낙청양. 처량하게도 처량검을 익혔다.

이런 건 줄거리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진 않지만, 사랑 때문에 평생을 바치는 캐릭터가 여럿 있는 걸 볼 때 아마도 원작 소설에는 로맨스가 아주 없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감동적이고 멋있는 장면이 많은데 다 쓰려니 구구절절 줄거리만 나열하게 될 것 같아 여기까지만 써야겠다.
<설영웅수시영웅>은 확실히 무협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소년가행>은 조정 이야기도 섞여 있어서 완전히 무협이라고 하긴 조금 뭣하다. 그렇다고 완전히 정치 드라마도 아니고. 결국 <설중한도행> 같은 장르라고 말하는 게 제일 정확할 것 같다. <설영웅수시영웅>같은 정통 무협을 기대한다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설중한도행>같이 다양한 고수가 나오는 무협 70/정치 30쯤 되는 이야기도 재밌게 본다면 잘 맞을 수 있다.
난 무공 급수를 정해놓고 싸우는 것이나, 비검이나 요술 같은 판타지가 섞인 무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요즘은 이런 유가 워낙 많아서 익숙해진 건지 몰라도, 이 드라마를 '무협'이라고 생각하고 봤다. 무협 팬이지만 이런 판타지 풍도 즐기는 사람에게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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