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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소설/잡설

보보경심 번역 후기

by 와룡 2013. 2. 20.

무협 소설을 번역할 때, 역사와 유관한 내용이 조금이라도 나올 경우 항상 한 번 쯤 생각을 하게 된다.

독자는 이 역사적 사건을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독자는 이 역사적 사건을 얼마만큼 궁금해 할 것인가?


중국이라는 배경 때문에 우리가 모르는 그들의 역사, 문화가 항상 무협 소설에 등장한다. 또 무협이라는 장르의 특징 때문에 배경이 되는 시절은 자주 반복된다. 때문에 무협 소설을 많이 읽고 나면 무협에 늘 등장하는 시대적 배경과 역사에 대해서는 절로 어느 정도 알게 된다.


그리고 사실, 몰라도 읽는데 큰 지장은 없다. 무협 소설 출판사에서는 가능한 한 여러 계층의 독자를 확보하기 위해서 어렵지 않은 내용이 되길 바란다. (일단 내가 일해본 곳은 ^^;) 복잡한 사자성어, 한자, 고사를 나열해봐야 괜히 어렵게 느껴져서 손이 안 갈 수도 있으니까.


난 중국의 역사를 무척 좋아하기 때문에 번역하는 내용 중에 역사적인 사건이 나오면 반가워서 어떻게든 남들에게 얘기하고파하는 성격이다. 게다가 내가 흥미를 갖는 작품도 역사 배경이 짙은 것들인데, 이런 것들은 김용 정도의 작가가 아닌 이상 국내 출판사에서는 다소 싫어할 수 있다. 

내 지인은, 네 취향은 절대 대중적이지 않으니, 네가 재밌어 하는 건 분명 남들은 좋아하지 않을거라는 말도 했다. 그래서 가능한한 내가 좋아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업하려고 한다.



<보보경심> 번역할 때도 같은 생각을 했다.

<보보경심> 특히 역사적 배경이 중요하고, 작가가 이런 저런 고사를 많이 썼기 때문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이 되었더랬다. 하지만 역시 무협 소설과 같은 방향으로, '최대한 어렵지 않은' 방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일단 말투는 최대한 현대적으로 옮기기. 

가능한 한 중문이 아닌 단어(몽고어나 만주어)는 한자를 달지 않기.

일반적으로 의미파악이 어려운 단어는 유사한 의미의 한국어로 바꾸기.


사실 출판사에서는 <보보경심> 팬들이 역사에 대해서도 많이 궁금해한다며 여러 부분에서 주석과 한자를 달아주길 요청했다. 그래서 많이 추가한 편인데, 아무래도 역자주다보니 한 두 줄 짜리로 써서 아직도 좀 부족하게 느끼는 독자가 있는 모양이다.


책이 출판된 후에 웹에서 번역에 대한 평가(?)를 잠시 검색해봤는데, 문체가 건조하다는 평을 보고 살짝 찔렸다.

건조한 문체를 많이 쓴다는 말을 들어서, 이번에는 좀 더 부드럽고 현대적으로 써보려고 했는데도 여전히 본래 모습이 드러났나 보다.


그래서 나도 후기를 써서 위에 썼던 몇 가지 원칙을 지키기 위해 빠뜨렸던, 혹은 바뀌었던 부분을 짚어보려 한다.

청나라 역사는 나도 별로 좋아라하지 않아서(난 변발이 싫어요!) 잘 몰랐는데, <보보경심>을 보면서 많이 알게 됐다.


청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다 보니, 만주어와 한어가 공존한다. 번역을 하다보면 만주어 단어를 한자어로 옮겨서 독음을 달거나, 아니면 만주어를 같은 의미의 한어로 옮겨 한국어로 해석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예를 들어 皇阿玛라는 만주어는 한어로는 父皇이라는 뜻이고, 이걸 다시 아바마마라는 우리말로 옮긴다. '황아마(부황)'이라고 독음을 달 수도 있지만, 국내 독자들이 '아바마마'를 어색하게 느끼지 않으니까 가능하면 우리말로 옮겼다.


반면에 阿哥 福晋 贝勒 같은 경우는 조금 고민이 되었다.

阿哥는 만주어로 아들을 의미하며, 청나라 땐 미성년 황자에 대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나중에 이 阿哥가 장성하여 작위를 받으면 贝子나 贝勒이 될테니 한 사람에게 阿哥와 贝子를 동시에 사용할 수는 없다. <보보경심>의 약희는 공식적으로는 항상 작위를 붙여 부르지만, 마음 속으로 누군가를 부를 땐 꼭 XX째 阿哥라고 칭하기 때문에 저 단어를 그냥 '황자'라고 번역했다. 그럼 저 황자가 자라서 贝子가 되어도 황자라 불러도 될 테니까.


贝子와 贝勒은 작위니까 한자어로 바꾸어 독음대로 패자, 패륵으로 썼다. 근데 또 문제는 福晋이다. 황자 부인이든 패륵 부인이든 일단 부인은 다 福晋이라고 부르는데, 청나라 황실에서 이 칭호는 황자의 부인에게 내려지는 정식 봉호다. 

그러다보니 이 단어를 단순히 '부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 더군다나 정福晋과 측福晋 서福晋까지 있으니.


주석삼아 덧붙이자면, 정福晋과 측福晋은 정식 봉호인 반면, 서福晋은 봉호가 아니며 앞의 두 부인보다 지위가 낮다. 때문에 측실인 측福晋은 서열이 정福晋보다 낮을 뿐 결코 '첩'이 아니다. 때문에 약희의 언니처럼, 만주 귀족 가문에서도 딸을 황자의 측福晋으로 보내곤 했다. 물론 명혜나 명옥 같이 최고급(??) 가문의 딸은 정福晋으로 시집가는 게 마땅하겠지만.


아무튼, 이 福晋이란 단어는 번역이 꽤 까다로웠고 결국은 독음을 붙이는 식으로 정리되었다.

드라마가 먼저 소개된 만큼 가능하면 드라마와 같은 식으로 번역하고 싶었는데, 내가 번역을 맡았을 땐 이미 국내에 방영이 끝나서 한글 자막이 있는 것은 찾을 수가 없었더랬다... 그러다보니 드라마와 달라져서 드라마 팬들에겐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단어도 있을 수 있겠다.


<보보경심>은 강희제의 치세가 길어지고 태자의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발생한 황자들이 황위 계승 싸움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강희제가 조금 빨리 죽었다면 혹시 일어나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지만, 일단 너무 오래 황위에 있다보면 태자가 위기를 느끼게 되고 황제 역시 태자를 경계하게 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사건 이후로 청나라는 태자를 일찍 지명하지 않게 되었다. 태자를 미리 세우면 태자에 아첨하는 무리가 늘어나고, 그럼 아무리 똑똑한 태자도 아부하는 말에 넘어가서 무슨 잘못을 저지르게 될지 모르니까.

윤잉을 폐위한 후, 강희제는 태자를 세우지 않았고 죽기 전에 유조를 남겨 옹정제를 세웠다. 유조로 후계자를 지목하는 것은 이때 시작되었지만, 만일을 대비해 황제가 마음에 둔 후계자의 이름을 건청궁 편액 뒤에 써 놓는 것은 옹정제가 시작했다고 한다.  


사실 강희제가 정말로 옹정제를 지목했느냐는 논란거리다. 유조에 '십사황자'라고 쓴 것을 십(십)자를 제(제)로 고쳐 제사황자라고 바꾸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보보경심>도 옹정제가 십사황자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가정하고 쓴 글이다. 


<후궁견환전>이 옹정제 시대 이야기라고 해서 <보보경심>과 많이 비교되는 모양인데, 사실 <후궁견환전> 원작 소설은 가상 역사를 기반으로 쓴 것이고 옹정제와는 무관하다. 하지만 드라마를 역사적 사건과 교묘하게 잘 버무려 놓았다. <후궁견환전>에서 황제의 애첩인 화비는 연갱요의 누이로 나오지만, 역사적으론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야기다. 연갱요의 누이는 사사당하지도 않았고, 슬하에 자녀도 있었다.


역시, 역사 이야길 하다보니 말이 길어졌다.

나도 아직 책을 다 읽지 못해서 어디까지 주석이 붙여져 있나 모르겠지만, 하나씩 읽어보며 풀이가 더 필요하다 생각되는 부분은 계속 포스팅 할 생각이다.


<보보경심> 작가는 처음 쓴 작품이라고 하지만, 역사나 문화에 꽤 조예가 깊은 것 같다. 아니면, 중국 사람이니까 중국 역사와 문화를 잘 아는 게 당연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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