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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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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영화와 드라마

<천추태후>의 왕, 경종

by 와룡 2009. 1. 13.

퓨전 사극의 바람이 부는 요즘 시대에 <천추태후> 는 약간 색다른 느낌이 드는 작품이다.
물론, 퓨전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태왕사신기나 바람의 나라처럼 판타지인지 무협인지 알쏭달쏭한 상태는 아닌 '사극'이다. 역사적 사실이 아닌 듯 보이는 광종의 대목왕후 살해사건 같은 것이 끼어들긴 했지만 드라마의 특성상 작가의 상상력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을테니까.

아무튼 이 <천추태후>에 처음부터 관심이 간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2편을 보다가 천추태후의 어린시절 이야기가 꽤 재미가 있어서 계속 보기로 결심했다.
특히 왕 경종의 이야기가 흥미롭다. 보면 볼수록 이 '미친' 왕은 연산군을 연상시킨다.
그 역시 연산군처럼 본래는 명석했으나,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을 알게되면서 술과 향락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할머니 - 비록 외할머니긴 하지만 따지고보면 왕태후인 - 가 어머니를 죽게 한 원흉이라 생각해서 맞대결 하는 것도 비슷하다.
조선역사상 연산군만큼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 왕이 별로 없다보니 연산군 이야기는 벌써 몇번째나 드라마/영화로 만들어졌다. 연산군을 연기한 배우들은 '복수심에 불타는' 왕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는데, 덕분에 그들은 '폭군'이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게 해 주었다.

<한명회>
의 연산군 이민우는 본래 사극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준 배우로써 연산군 역을 훌륭하게 소화했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부드럽고 인자한 외모를 가진 그가 연기한 연산군은 '복수의 화신' 그 자체라고 할 정도였다.
이듬해 다시 유동근<장녹수>에서 연산군을 맡았는데, 장녹수라는 여자가 연산군의 애첩으로 주목(?)받게 된 것은 아마 이 드라마부터이리라. 폭군의 곁에는 항상 미녀가 있기 마련이라는 법칙에 꼭 들어맞는다. 유동근의 연기야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이니 그의 연산군이 훌륭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장녹수>라는 드라마의 입장상 연산군의 여자관계를 중심적으로 다룬데다 너무 나이가 든 연산군이라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어 내가 좋아하는 배우 중 한 사람인 안재모가 <왕과 비>에서 연산군을 열연했다. 이민우와 마찬가지로 곱상하고 착한 외모의 그는 '세종대왕'을 연기했던 모습에서 벗어나 악의에 찬 연산군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 드라마에서 인수대비를 연기한 채시라는 당해 연기대상을 수상할 정도로 놀라운 연기력을 뽐냈다. 인수대비와 연산군의 대결구도라는 점에서 <왕과 나>만큼 긴장넘치게 그린 작품은 없을 것이다.
최근 CNTV에서 <왕과 비>를 방영하고 있는데 때마침 연산군이 외할머니 신씨를 불러들여 어머니의 원한을 알게되는 부분이 등장한다. (2009.1월)

작년 <왕과 나>에서도 정태우가 연산군을 연기하긴 했지만 보지 못했으니 제외하고, 이런 사극에 등장했던 '폭군'의 모습은 한 나라의 왕으로써 위엄을 갖추면서도 피를 부르는 데 눈깜짝하지 않는 악마적인 모습이었다.

그러나 영화 <왕의 남자>에 나타난 정진영의 연산군은 - 물론 드라마와 영화라는 흐름 차이는 있겠지만 - '폭군' 연산 보다는 '광기어린 왕'의 모습이었다. 어차피 관객이 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을테니 자질구레한 사설 따위는 집어치우고, 외로움에 지쳐 술과 향락에 미쳐버린 왕의 모습만을 압축해 담았다. 늘 으르렁거리기만 하던 기존의 연산군이 아니라, 광대들과 함께 즐기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애정을 느끼기도 하는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그 때부터 '폭군'의 이미지는 '광기의 왕'으로 바뀐다. 퓨전 사극으로써 어떤 왕인지 명시하지 않은 <쾌도 홍길동>의 왕 이광휘가 정진영의 연산군 뒤를 이었다. 물론 계모와 배다른 아우를 죽이고 왕좌에 오른 사실로부터 광해군을 본뜬 캐릭터임을 알 수 있는 그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와 그들의 원혼을 두려워하다 미쳐 버린 왕이다. 말투나 행동거지가 독특한데다 잔인하면서도 어딘지 동정이 가는 역할 자체도 매력적이었기 때문에 작년 남우조연상에 그를 연기한 조희봉이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천추태후의 경종이 나타났다. 처음 최철호 경종을 보았을 때는 연기에 다소 힘이 들어간듯한 모습이 거슬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모습에 애정이 간다. 제대로된 미친 왕이라서 '황제 자리 따위 갖고 싶으면 니가 해'라는 말조차 서슴지 않는다. 대신들에게 '똥씹은 표정'이라고 다그치는 것도 귀엽다.
더욱이 그는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적의 미치광이가 아니다. 이후 어떻게 진행될지 모를 일이지만 천추태후, 즉 황보수(아역 김소은)에게서 어머니 대목왕후(이영아)의 모습을 본 후 그녀의 말을 들어준다. 내가 보아도 선녀같이 너무도 아름다운 김원숭의 딸 부용(아역 김민지, 훗날 성종 왕치의 부인이 됨)을 보고서도 결국 그녀를 포기(?)하고 황보수를 왕후로 들이는 데 찬성한 것도 그런 마음의 일환이 아닐까. 그리하여 두 왕후를 두고도 아이가 없던 그와 황보수 사이에 첫 아들이자 유일한 아들인 목종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경종과 황보수의 이야기는 순정만화에 나오는 한 쌍의 커플 이야기로 부족함이 없다. 물론 <천추태후>에서 그렇게 그릴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황보수가 다 자라서 태후가 될 때까지만은 즐거운 마음으로 이 드라마를 보게 될 것 같다.

<천추태후>를 보다보면 너무도 복잡한 '근친 결혼' 때문에 누가 누군지 헷갈려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다. 해서 위키백과를 뒤져 가계도를 한번 그려보았더랬다. 문득 <천추태후> 홈페이지에 이와 같은 내용이 있는지 확인해보지 않았단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덕분에 복잡한 고려 왕실 가계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다.

가계도에서 보는 것처럼 태조 왕건이 너무 많은 여자와 결혼한 바람에 복잡하게 된 셈이다. 특이할 점은 여자들이 모계의 성을 따른다는 것이다. 정치 안정을 위해 호족의 딸과 혼인한 왕건이었으니 왕후의 집안이 권세가라는 것은 당연하고, 그 때문에 권세가의성을 계속 후손에게 물려준 것 같다. 따라서 대목왕후가 남편 광종의 이복 남매임에도 성이 다르고, 황보수, 황보설(아역 박은빈) 또한 할머니 신정왕태후(반효정)의 성을 따른 것이다.

<천추태후>에서는 경주(신라)계와 황주계의 싸움이 치열하게 그려지니 일부러 신라계를 표시해보았다. 김원숭(김병기)도 신라왕실의 후손이라고 하니 신라계인데, 황주계인 성종 왕치(아역 최우혁)에게 딸 부용을 시집보냄으로써 결국 두 파벌이 결합하는 상태가 되며,또 나중에 헌정왕후(황보설)와 신라계인 왕욱(김호진)과의 사이에서 난 현종이 즉위하면서 다시금 두 파벌이 결합을 이룬다. 물론 가계도만 보고 내마음대로 생각한 것 뿐이며 실제 역사는 어떤지 알 수 없다. 하긴, 나중에 천추태후의 연인이 되는 김치양(김석훈) 또한 신라계이니 이미 그 전부터 신라계니 황주계니 하는 파벌싸움은 끝이 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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