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래 끈 작품이다. 결말이 다소 싱겁다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고룡 스타일을 느낄 수 있어서 매우 좋았다.
사
일단 문장이 화려하면서도 깔끔하다. 내용전개가 빠르고 독특한 소재를 사용하지만, 다소 잔인한 구석이 있다.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말이 되는 것처럼 꾸며놓는 고룡의 솜씨를 빼다 박아서 이때부터 그녀에게 마음이 갔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벌이기를 좋아해서 너무 다작을 하고 있다는 것.
인간육도 시리즈는 불교에서 말하는 여섯 가지 세상, 즉 천상계, 인간계, 아수라계, 축생계, 아귀계, 지옥계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런데도 겨우 <수라도>, <인간도>만 완결되었고(게다가 수라도에서 인간도 사이에 몇년이 지났다) 나머지는 아직 준비중이라고 한다.
아무튼 이 <수라도>는 아수라계를 그린 것이니만큼 싸움과 욕망이 주제이다. 여러가지 고사전기에서 인용한 인물들이 살수로써 나타나 서로 죽고 죽이며 싸운다. 따라서 각 장제는 해당 인물의 이름이고, 장 마지막마다 그 인물에 관한 전설과 보비연 자신의 평을 실었다.
끝까지 보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줄거리는 짐작할 만 하다. 어찌보면 감동이나 깊이는 없을지 몰라도 격정적이고 화려한 진행장면을 보면 영화로 만들기에 딱 좋을 것 같다. 액션이 화려하고 별 내용은 없는 중국 무협 영화랄까.
그 첫장을 올려본다.
제 1장 배항(裴航)
가을도 막 끝날 무렵, 주룩주룩 내리는 안개비가 이 변경 마을의 하늘을 뒤덮은 날이었다. 추수를 마무리하고 추위에 대비해 집을 보수하려던 마을 사람들은, 문득 마을에 낯선 사람들이 늘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한명씩 나타난 것 같기도 하고, 하룻밤에 한꺼번에 나타난 것 같기도 했다. 친척이나 친구를 찾으러 온 것도 아니었고 장사를 하러 온 것도 아니었다. 낮이면 마을 구석구석의 골목으로 숨기라도 했는지 전혀 보이지 않다가, 밤만 되면 갑자기 나타나 밤도깨비 마냥 소리 없이 마을을 떠도는 것이었다.
주민들은 이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알지 못했고, 더욱이 이 마을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다만 알 수 없는 두려움 때문에 밤이 되면 문을 걸어 잠근 채 그들이 어서 빨리 마을을 떠나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배항은 낯선 사람들 중에서도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에게는 짐이 없었다. 유생들이 입는 청삼을 입고 있어서인지 겉보기에는 무척 온화하고 예의바르게 보였다. 그가 입은 옷은 소매가 이상하리만치 길어서 거의 무릎까지 닿을 정도였다. 그가 이곳에 나타난 지 벌써 7일째건만, 누구도 그의 손을 본 적이 없었다.
다른 낯선 방문객들과 비교해 다른 점이라면, 밤에 거리를 활보하지 않고 마을에서 유일한 객잔에만 처박혀 있다는 것이었다. 낮에는 객잔 위층에 올라가 창에서 가장 가까운 팔선교자에 자리를 잡은 후, 깨끗한 물 한잔만 시킨 채 하루 종일 창밖만 뚫어져라 주시하곤 했다.
그는 물 말고는 객잔의 그 어떤 음식도 먹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씀씀이는 후한 편이라서 실컷 먹고 마시는 손님보다 더 많은 돈을 냈다. 객잔 주인이 그를 보기만 하면 싱글벙글 웃는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을에 떠도는 그에 대한 소문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도 있었고, 전설에 나오는 백원도인(白猿道人)이 승천하기 전에 마을에 묻어둔 천서를 찾아왔다는 말도 있었다. 어렸을 적 소꿉친구였던 소녀의 규방을 보기 위해서 위층 창가에 앉는다는 소문도 있었다. 비록 그 소녀는 더 이상 그곳에 살지 않지만 그래도 그는 매일같이 찾아와 그곳을 바라본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 때문에 호기심을 참지 못한 점소이는 몰래 그가 앉았던 위치로 가서 창밖을 내다보았지만 곧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창밖에는 전혀 특별한 광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청석을 깐 비좁은 도로 맞은편에는 평범한 누각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벽돌은 싸구려 석회로 하얗게 칠해있었는데, 그 빛깔은 마치 삼류 기녀의 얼굴에 바른 분 같았다. 처마를 따라 빽빽하게 쌓은 검은 기와 가장자리로 가닥가닥 그려지는 빗줄기가 문지방 앞 청석판 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어젯밤 내린 폭우 때문에 어스름이 질 무렵의 날씨는 약간 싸늘했다. 공기 속에는 동식물들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객잔 안에는 그래도 드문드문하게나마 손님이 앉아 있었다. 손님들은 술을 마시면서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한쪽 구석에서 미미하게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떠들썩하게 술판이 벌어진 객잔 안에서 이 훌쩍임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마냥 아무런 주의를 끌지 못했다.
그러나 배항의 공허한 눈동자만은 매처럼 예리한 빛을 번뜩이며 줄곧 앞에 있는 계산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 마을에는 홰나무가 많이 자라기 때문에 일반 가정집에서 쓰는 가구는 한결같이 나무 받침대 두 개와 두꺼운 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저 계산대는 달랐다. 이 계산대는 이상하리만치 큰 절구모양의 돌을 엎어 놓은 것으로, 육중하고 오래되어 보였다. 위에 깔아놓은 두꺼운 나무판은 반 이상이나 시꺼멓게 변해 있었다.
계산대 옆에는 열 두세 살 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차가운 돌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헤어져서 너덜너덜한 밀짚모자를 푹 눌러썼지만 그 아래로 윤기 없는 머리카락이 보였다. 소녀는 낮은 소리로 흐느끼는 중이었다. 날씨가 그다지 춥지 않은데도 남자들이나 입는 삼베 장삼으로 몸을 둘둘 감고 있었는데, 품안이 불룩한 것을 보아하니 안에 뭔가 숨기고 있는 듯 했다.
배항의 얼굴빛이 변했다. 그는 앞에 놓인 물을 밀어놓고 천천히 소녀 쪽으로 걸어갔다.
소녀는 배항이 앞에 서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여전히 훌쩍이기만 했다. 배항의 얼굴빛은 매우 어두웠다.
“네 이름이 뭐냐? 어디서 왔지?”
소녀는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푹 숙였다. 그리고 품안에 있는 물건을 꼭 끌어안으면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너무 낮은 목소리여서 뭐라고 하는지는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배항은 냉소를 지으며 그녀의 품을 가리켰다.
“그건 뭐냐? 내 놔 봐!”
소녀는 그 물건을 보호하듯 몸을 더욱 웅크리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한 순간, 배항의 창백한 얼굴에 흉악한 표정이 떠올랐다. 푸른 옷소매가 번쩍하더니 어느새 나타난 커다란 손이 소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피부가 누렇고 뼈마디가 돌출된 이 손의 엄지 옆에는 또 하나의 손가락이 달려 있었다. 마치 새의 발톱 같았다.
그가 가볍게 힘을 주어 소녀를 허공에 들어올리자 소녀가 켁켁거리는 소리를 냈다. 밀짚모자가 땅에 떨어지고 창백하면서도 공포에 질린 얼굴이 나타났다. 눈은 컸지만 빛이 없었고, 얼굴의 윤곽은 더없이 아름다웠지만 그 피부는 잿빛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은 죽어가는 빛깔이었다. 아무래도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할 것 같았다.
배항은 동정심이라고는 전혀 들지 않는 듯 소녀의 연약한 어깨를 틀어쥐었다. 그가 힘을 주자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품에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배항은 그 물건을 받아들었다. 헝겊으로 만든 인형이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인형이었지만 머리가 무척 컸다. 진짜 사람만한 머리가 작디작은 몸 위에 얹혀 있어 비율이 전혀 맞지 않았다. 그 커다란 얼굴은 눈, 코, 입조차 없는 흰 천으로 되어 있었는데, 구정물이 묻어 얼핏 보기에는 피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형편없이 만들어진 인형이라 안에 넣은 볏짚이 여기저기 삐져나와 있었기 때문에 어두운 곳에서 보니 이상하면서도 두려운 느낌을 주었다.
배항은 소녀를 한쪽으로 팽개친 후 손가락으로 인형의 몸을 샅샅이 뒤졌다. 몇 번이고 뒤지다가 두드려보다가 하던 그의 얼굴에 실망한 빛이 떠올랐다. 확실히 이 인형은 낡은 것이었지만, 결코 특별한 용도를 위해 만든 것은 아니었다. 겉에도 독이 없었고 볏짚으로 가득 찬안에도 뭔가를 숨길만한 공간은 없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인형인 듯 했다.
이 곳에 너무 오래 있다보니 별것 아닌 것에도 긴장하게 된 모양이군, 하며 배항은 자조 섞인 미소와 함께 소매에서 동전을 꺼내 소녀에게 던진 후 돌아섰다.
순간, 소녀가 공포에 질린 눈동자를 크게 뜨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더니 울면서 외쳤다.
“아빠가 살해당했어요... 개미... 개미가 너무 많아, 날 좀 구해줘, 살려줘!”
배항의 얼굴빛이 변했다.
이런 시기에 마을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은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네 아버지가 누구지? 무슨 일이 생겼느냐?”
소녀는 얼굴을 가린 채 같은 말을 반복할 뿐, 그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가 난 배항의 얼굴이 굳어졌다. 옆에 있던 비단 옷을 입은 뚱뚱한 중년 남자가 두 손을 모은 채 다가왔다.
“손님, 화를 가라앉히시지요...”
목소리를 듣자하니 객잔 주인이었다.
정신이 나간 듯한 이 소녀에게서는 더 알아낼 것이 없다는 생각에, 배항은 소녀는 내버려둔 채 주인에게 물었다.
“저 애는 누구요?”
주인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대답했다.
“저 계집애는 이곳 사람이 아닙니다. 3일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객잔에 왔었지요. 고향에 흉년이 들어 이 마을에 사는 친척에게 의탁하러 왔는데, 친척도 찾지 못하고 남은 여비도 없고 해서 마을 서쪽의 홰나무 숲에 잠시 머물겠노라 하더군요. 그러다 비 오는 날 밤 아비가 갑작스레 병을 얻어 죽고, 혼자 남은 저 애는 매일같이 울어대면서, 그 뭐라더라, 몸을 팔아서라도 아비의 장례를 지내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생김새가 쓸만해서 딸애의 친구삼아 소인이 하녀로 거두려고 했는데, 저 계집애가 크게 놀란 모양인지 약간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지 뭡니까. 저러니 누가 사려고 하겠습니까? 쫓아도 가지 않으면서 저렇게 마을 사람들에게 남은 밥이나 얻어먹으며 살고 있습니다만, 언제 여기 들어와서 손님을 귀찮게 해드렸는지 모르겠군요. 소인이 당장 밖으로 쫓아내겠습니다. 점소이야!”
“잠깐.”
배항이 손을 들며 막은 후, 몸을 숙여 소녀의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네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해 보아라.”
소녀는 전전긍긍하며 고개를 들더니 우는 듯 웃는 듯 입을 열었다.
“자다가... 꿈을 꾸는데... 개미가...”
배항이 눈을 찌푸렸다.
“꿈속에서 네 아버지가 죽었단 말이냐?”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가로저었다.
배항은 한숨을 내쉬며 은자를 꺼내보였다.
“내가 너를 살 테니 네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가자.”
소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은자를 바라보았다. 한참 후, 마침내 은자를 받아든 소녀는 인형을 품에 꼭 안고 비틀비틀 문밖으로 나갔다.
산기슭에는 울창한 홰나무 숲이 깊은 곳까지 뻗어 있었다. 축축한 땅위에는 새로 난 버섯이며 먹이를 찾으러 나온 파충류가 그득했다. 굵고 커다란 나무 아래쪽에 사람의 반만한 크기의 개미굴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 한 구가 그 위에 매달려 있었다!
시체의 눈동자는 파 먹혀서 피로 물든 구멍만 휑하니 뚫렸고, 검은 개미떼가 여전히 코와 귓구멍을 들락날락하며 기세등등하게 개미굴 안까지 피에 젖은 살덩어리들을 운반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많은 수의 동료들은 시체의 몸을 빽빽하게 뒤덮은 채 상처 속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이 시체에는 완전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어찌나 공포스러운 장면이었는지 배항조차 살짝 얼굴빛이 변했다.
그러나 소녀는 순진한 미소를 떠올리며 냄새나는 시체에게 달려갔다.
“아빠!”
배항이 얼른 그녀를 붙잡았다.
“미쳤느냐? 개미가 너까지 잡아먹을 거다!”
그는 땅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 시체의 머리 부분부터 두드려보았다. 워낙 심하게 망가진 상태라, 이 사람이 중년 남자이며 개미가 물어뜯은 것 말고는 치명적인 상처가 전혀 없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었다. 피가 응고된 것으로 보아 중독된 것 같지도 않았다.
배항은 고개를 저으며 나뭇가지를 던져버렸다. 어쩌면 이 사람은 보통의 난민일지도 모른다. 연일 비바람을 맞으며 노숙하다가 병이 발작해서 비가 오는 날 밤에 죽었고, 개미가 몰려와 엉망이 된 것일 뿐인지도.
“놔!”
소녀는 몸을 뒤틀면서 시체에게 가려고 발버둥쳤다. 배항은 억지로 그녀를 몇 걸음 물러나게 한 후, 품속에서 자기로 만든 병 하나를 꺼냈다. 병을 기울여 붉은 가루를 땅에 뿌린 다음, 화섭자에 불을 붙여 바닥에 던지자, ‘칙’하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불꽃이 일더니 순식간에 개미굴과 시체를 집어삼켰다.
“아빠!”
소녀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불더미로 달려들었다. 온힘을 다해 발버둥을 치자 가녀린 피부에 힘줄이 솟고, 허약하고 여윈 몸에도 마력 같은 힘이 솟구치는 듯 했다. 배항은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갑자기 소녀가 고양이 같은 소리를 내더니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스르르 땅으로 쓰러졌다. 배항이 고개를 살짝 돌리자 비황석 하나가 그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화가 치밀었다.
“누구냐?”
숲 저쪽에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한순간 바람에 실려 희미하게 흩어졌다.
배항은 어쩐지 이 사람이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과 관계가 있는 게 틀림없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소녀의 생사 따위는 내버려 둔 채 서둘러 숲 저쪽 끝으로 달려갔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어서인지 하늘을 찌르는 높이의 숲 속 고목들은 더욱더 음산해보였다. 커다란 나무 둥치가 이리저리 얽혀 마치 언제든 부활하여 사람을 잡아먹을 수 있는 봉인된 괴수 같았다.
배항은 소리가 나는 곳을 따라 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동안 숲을 헤맸을까, 마침내 숲 밖으로 지는 황혼이 눈에 들어왔다.
숲 앞은 계단식 밭이었고 작은 시냇물이 어디론가 흘러들고 있었다. 부드러운 웃음소리는 이미 어디로 갔는지 사라진 후였다. 저 멀리 둘러선 산들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검은 나귀를 탄 한 여자가 시내를 따라 그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이었다. 하녀로 보이는 또 한 명의 여자는 한 손에 고삐를 쥐고 다른 손에 대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대바구니 안에는 은으로 도금한 술병이 들어 있었다. 두 사람은 다른 것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간간이 웃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들은 마치 배항이란 사람이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웃으며 얘기하며 그 옆을 무심히 스쳐지나갔다. 배항은 한줄기 미소를 떠올리더니, 두어 걸음 뒤를 쫓아가며 두 손을 모았다.
“나귀에 타신 낭자께선 잠시 기다려주시오.”
하녀가 홱 돌아서서 그의 앞을 가로막더니 화가 난 듯 말했다.
“우리 아가씨는‘나귀 탄 낭자’가 아니라 운영(雲英)아가씨 라구요!”
아가씨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타일렀다.
“은낭(銀娘), 쓸데없는 소리 말고 잠깐 물러나렴.”
하녀가 입을 삐죽이더니 대바구니를 내려놓고 물러섰다. 배항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운영낭자, 본인은 배항이라 하오. 오랫동안 길을 걷다보니 지쳐서 물이라도 한잔 얻어 마시고 싶소이다.”
운영낭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배항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이 운영낭자의 얼굴은 평생 잊기 힘든 얼굴이었다.
눈은 실처럼 가늘고 길었으며, 작고 길쭉한 얼굴에는 흰 분을 발랐지만 여기저기 난 노란 주근깨를 가리지 못했다. 두 뺨에는 피같이 붉은 연지를 찍었고 높이 솟은 콧날은 어딘지 어색했다. 이 얼굴은 아무리 봐도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었지만,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요기가 있어 보는 사람의 혼을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운영이 눈동자를 굴리며 빙긋 웃었다.
“공자께서는 어째서 그런 눈으로 절 보시나요?”
그러면서 그녀는 몸을 숙여 대바구니에서 술잔을 꺼내 배항에게 건네는 한편, 나귀에 목에 걸린 물통을 열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물통은 이미 비어 있었다.
운영이 고개를 저으며 겸연쩍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말 공교롭게 되었군요...”
배항은 가만히 그녀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용모는 평범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이 더없이 곱고 우아하여, 거칠고 촌스러운 시골처녀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배항의 얼굴빛은 곧 원래 색을 되찾았다. 그가 미소하며 대답했다.
“낭자의 잘못이 아니라 본인이 복이 없는 탓이오. 헌데 낭자는 어디 사시는 분이기에 날이 저무는 때 홀로 산을 거닐고 계시오?”
운영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니 묘에 들렀다가 늦기 전에 돌아가는 길이랍니다.”
배항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모았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인데 자당께 실례를 범하게 되었구려.”
운영의 새하얀 얼굴에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랐다.
“미안해하실 것 없어요, 공자. 제가 말한 어머니는 저를 낳아주신 분이 아니니까요.”
“아, 그렇구려.”
운영이 또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운영은 양가집 규수가 아니랍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며 배항을 응시하다가 부드러운 추파를 던지며 말했다.
“이 운영은 바로 세상을 떠돌며 오는 사람을 맞고 가는 사람을 배웅하는 그런 사람이지요.”
배항은 무슨 뜻인지 알고 즉시 대답했다.
“그러시다면 낭자께서 어디 머물고 계신지 알려 주겠소?”
운영이 미소를 지었다.
“공자께서 비웃지 않으신다면 말씀드리죠. 1년 전 어머니께서 병사하신 후 저와 이 애만 남게 되었지만 단골손님들이 있어서 억지로 목숨은 연명했지요. 이 곳은 궁벽한 곳이라 손님이 많지 않지만, 다행히도 운래객잔(雲來客棧)의 주인께서 객잔 맞은 편 누각에 방을 한 칸 얻어 주셨지요. 덕분에 저와 은낭은 그곳에 머물고 있습니다.”
배항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객잔 맞은편 누각에 살고 있다니, 결코 틀리지 않은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그는 미소 띤 채 말했다.
“오늘 밤 방문해도 괜찮겠소?”
운영은 배항을 아래위로 몇 번 살펴보더니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 같은 분이 몸을 낮추어 이 수라진까지 오신 데에는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그것이 무언지 모르겠군요?”
배항은 여전히 미소를 띤 채였지만, 그 미소는 매우 음침했다.
“나는 사람을 찾으러 왔소.”
“공자께선 몇 명이나 찾으시려는지요?”
“많진 않소. 열 한 명이오.”
“벌써 찾으셨나요?”
운영이 웃으며 묻자 배항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한 사람도 찾지 못했소.”
운영은 그를 흘끗 바라보더니 물었다.
“그 사람들을 찾아 무엇 하시게요?”
배항은 먼 곳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어딘가로 보내주려는 것이오.”
운영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알겠어요. 공자께선 범인을 잡으러 마을에 오신 포두이셨군요. 최근 이 마을에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어요. 덕분에 마을 사람들이 잔뜩 겁을 먹어 제 장사까지 망치게 되었답니다. 공자께서 그들을 잡아가신다면 정말 좋겠어요.”
배항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낭자의 추측은 틀렸소. 난 사람을 잡으러 온 게 아니라 죽이러 온 거요.”
그는 이렇게 말하며 운영의 표정을 살폈지만, 그녀는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가볍게 고삐를 흔들었다.
“날이 저물었으니 이만 가야겠어요... 은낭-”
그녀는 다시 한번 배항을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다 찾으시거든 절 한번 찾아주세요.”
그녀는 배항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저녁 이슬이 떨어지는 길에 맑은 발굽 소리가 울리더니 어느새 그녀의 모습은 멀어지고 있었다.
배항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도 점차 식어갔다.
이곳에서 이렛동안 기다렸지만, 결코 헛수고는 아니었던 것이다.
두 여자의 뒷모습이 저녁 어스름에 사라지는 순간, 요기가 뚝뚝 흐르던 여자가 고삐를 당기더니 종이같이 새하얀 얼굴을 돌려 혼을 쏙 빼놓는 미소를 그에게 던졌다. 그 요사한 냄새가 순식간에 그를 덮쳐왔다.
배항은 그제야 이것이 바로 죽음의 냄새임을 깨달았다.
더없이 기묘하면서도 사람의 마음을 끄는...
<배항> 전기
한 잔 미주(美酒)에 온갖 느낌이 드니, 현상(玄霜)을 찧어 운영(雲英)을 만났구나.
남교가 곧 신선의 마을인데, 어찌하여 험한 옥청산을 오르려는가.
당나라 장경(長慶) 6년, 배항이라는 수재(秀才)가 과거에 낙방하고 남교역(籃橋驛)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른 그는, 길가에 있는 초가에 들러 삼베옷의 노파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했다. 서생 같은 그의 모습을 보자 노파는 손녀딸 운영을 불러 물을 떠주게 했다.
운영을 본 배항은 깜짝 놀랐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인가!
깊은 골짜기에 피는 붉은 난조차 그녀의 향에 비길 수 없었고, 푸른 밭에 묻힌 아름다운 옥돌로도 그녀의 외모를 형용하기 어려웠다. 배항은 한 눈에 반해 그녀에게 구혼했다. 배항이 성실한 군자라고 본 노파는 이 혼사를 매우 반기며, 예물로 백옥으로 만든 절구를 요구했다. 노파에게는 선약(仙藥)이 한 알 있었는데, 백옥 절구에 찧은 후 먹어야만 신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배항은 기뻐 펄쩍 뛰며 백일 안에 백옥 절구를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몇 개월을 찾아다닌 끝에, 마침내 옥을 파는 노인에게서 절구를 살 수 있었다. 가진 재산을 모두 털었고, 말이며 하인까지 모두 팔아치워야 했던 그는 친히 절구를 등에 지고 남교역으로 향했다. 배항을 본 노파는 무척 기뻐하더니, 선약을 꺼내놓으며 배항더러 절구에 찧게 했다.
낮에 절구질을 한 후 저녁이 되어 쉬려는데 절구공이 소리가 밤새도록 들려왔다. 살펴보니 옥토끼 한 마리가 그 대신 약을 찧고 있는 것이었다. 옥토끼의 몸에서 나는 환한 빛과 선약의 맑은 향이 방을 가득 메워 마치 신선이 사는 곳 같았다.
배항은 더욱더 결심을 굳히고 백일 동안 정제하여 마침내 약을 완성했다. 그리하여 배항과 운영은 신선의 가족이 되어 함께 승천하게 되었다.
보비연평 : 배항우선(裴航遇仙)의 고사는 왕선객(王仙客) 이야기며 유의(柳毅)가 용녀(龍女)를 얻은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매우 단순하다. 남교역이니 옥토끼니 현상(玄霜)이니 경장(琼漿:좋은 술, 미주)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신선과 관련된 것으로, 그 분위기에 알맞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