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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맛보기

청설루, 드라마와 소설 원작 "약간" 비교

by 와룡 2019. 5. 28.

시간을 쪼개고 쪼개 조금씩 보는 드라마 <청설루>. 다른 일을 하느라 완전히 집중해서 보지는 못하지만 드문드문 고룡님 작품 느낌이 나서 즐기고 있다. 그중 하나가 황천의 이야기다.

황천은 맥천성이 꾸린 천리회 소속으로 맥천성을 따라 소억정을 공격하다 실패한다. 비록 주인공의 반대편에 서 있지만, 그가 천지회에 들어간 이유는 "약자를 돕고 정의를 수호한다"는 구호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청설루 사대호법 중 한 명인 자맥에게 제압되지만, 자맥이 잠시 당황한 사이 달아난다. 자맥은 어째서 그를 보고 당황했을까?
오래전 무공이라곤 모르던 시골 소년 시절, 친구처럼 기르던 말을 부잣집에 판 황천은 그집 도령이 말을 학대하는 것을 참지 못해 뛰어들었다가 몽둥이찜질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자맥은 길을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았다.
그의 올바른 품성을 믿었는지, 자맥은 그를 뒤쫓고도 일부러 놓아준다. 그 후 그는 복수를 위해 칼을 간다. 비장한 연출과 배우의 고독한 눈빛, 캐릭터가 가진 서사는 고룡님이 즐겨 쓰는 고독한 방랑자와 아주 닮았다. 게다가 대사까지.

훗날 황천은 자맥의 인도로 청설루에 들어와 청설루 사대호법 중 한 명이 된다.
찾아보니 작가 창월은 사대호법이 된 황천의 지난 이야기를 청설루 시리즈 중 하나인 <지간사>에 써냈다. 드라마 <청설루>는 소설 청설루 시리즈를 합쳐 만든 것이어서 그의 과거가 들어있다. 원작을 살짝 맛보자.

창월 작, <지간사指間砂> 일부


"황천, 그때 너는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이였어…”
길고 긴 세월이 흐른 후의 어느 날, 보라색 옷을 입은 여자는 청년의 어깨너머로 그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내면서, 나른하면서도 아리땁게 웃는 얼굴로 그의 손에 쥐어진 피 묻은 단검을 바라보았다.
누런 적삼을 입은 18살의 청년은 살짝 눈을 찌푸렸을 뿐 하얀 손수건으로 무기를 닦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는 눈을 내리뜨고 있었지만, 기다란 속눈썹 아래에 자리한 파충류같은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었다. 어두운 다갈색의 그 눈은 눈앞에 있는 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사랑스러운 아가, 오늘은 또 몇 사람이나 죽였지?"
그가 대답이 없자, 보라색 옷을 입은 여자는 도리어 웃음을 터트리면서 청년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췄다. 느슨하게 풀어진 눈빛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황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벌떡 일어나 힘껏 팔을 떨치자 들고 있던 검이 검자루만 남긴 채 바닥에 깊이 박혔다.
“자맥, 그때... 당신이었소? 소억정에게 계책을 낸 사람이 당신이었소?!"
느닷없이 음침하고 사나워진 그의 얼굴을 보고도 자맥은 오히려 웃음을 터트리며 재미있는 것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비웃음을 머금은 눈빛이지만 희미하게나마 깊숙이 빠져든 것 같은 표정이 느껴졌다.
"내게 그런 능력이 어디 있겠니? ...그때 나는 너를 알아보고 5년 전 그 마을 어귀에서 목격했던 광경을 별생각 없이 소 공자께 말씀드렸을 뿐이야. 훗, 그때의 너를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남들과는 다른 공자의 수완 덕분이었지."
그때의 그는, 장안성 천리회 문하에서 별로 눈에 띄지도 않던 인물이었다.
5년 전 그날 황혼이 내리던 그때 이후로 그는 모진 마음을 먹고 빈궁한 집을 떠나 강호를 떠도는 방랑의 생활을 시작했고, 마침내 혼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기술을 배웠다. 강호에 즐비한 수많은 문파 가운데 천리회를 선택한 것은, 그저 그 조직의 취지가 약자를 돕고 정의를 바로잡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자를 쓰러뜨리고 약자를 돕는다... 수없이 많은 나날 동안, 친구같던 말이 죽던 장면은 흩어지지 않고 그의 마음속을 맴돌았고, 농부의 자식이 강호의 소년으로 자라날 때까지 그와 함께 했다.
천리회의 생활은 가난하고 지루했을 망정 최소한 마음에 품었던 꿈만은 지켜주었다. 최소한, 열다섯 살 강호 소년이 이 세상을 향한 희망과 따스함을 조금이나마 지킬 수 있게 해주었다.


나중에 자맥과 황천이 연인관계가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짤은 떠도는데...

또 하나, 고룡님을 생각하게 하는 것은 주인공인 소억정이 쓰는 "도"다. 고룡님 소설에서 좀 멋있다 싶은 사람은 "도"를 주로 쓴다. 가장 인기 있는 <소리비도> 시리즈만 봐도 그렇다. 1, 2화를 볼 때만 해도 으레 그렇듯 소억정의 무기는 당연히 검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도였다니!

확실히 "도"였다!

맥천성이 천리회를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소억정은 놀라운 도법으로 홀로 적을 물리친다. 물론 결국 기침이 재발해 쓰러지는 상황에 처하지만...

쳐들어온 맥천성. 알고 보니 <운석전>의 한종안
도는 보이지 않지만, 아무튼 무시무시한 도법을 쓴다

전투 장면은 볼 만하다. 너무 멋있게 연출하려고 조금 오버한 것 같기는 하지만 <의천도룡기>보다는 나은 편.
그런데 안타깝게도 여자 주인공인 서정용 캐릭터가 너무 뜬금없다. 일단 무공이 높지 않다 하더라도, 싸움에서 소억정을 돕고 싶으면 최소한 무기라도 가져와 휘둘러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맨손에다(애초에 강호인이 왜 무기를 안 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싸울 생각은 하지도 않고, 누군가 소억정을 찌르려고 하면 그냥 몸을 날려 막으려는 엉뚱한 짓만 한다.

일단 몸으로 막고 보는 서정용

솔직히 나는 서정용이 왜 갑자기 소억정에게 정을 내비치는지 모르겠고(드문드문 봐서일수도 있지만), 왜 자꾸 몸으로만 막으려는 지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원작의 서정용은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생각난 김에 원작에서 서정용과 소억정이 어떤 관계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을 옮겨본다. 이 작품에서 화자는 서정용의 검인 '혈미(血薇, 핏빛 장미)'다.

창월 작, <혈미血薇> 일부분


"자, 우리가 했던 약속을 지키시오."
비무가 끝났다. 낯빛이 창백한 소 루주는 손목에 묶어놓은 손수건을 풀어 이마 위로 조그맣고 빽빽하게 샘솟은 땀방울을 닦았다. 그렇게 말하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기침을 콜록였다. — 기침을 할 때면, 온몸에서 미미한 경련이 일어 마치 폐를 토해내기라도 할 것 같았다.
병을 앓고 있구나.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그리고 나중에야 그가 앓는 것이 불치병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말을 듣자 주인은 망설이거나 피하지 않고 곧바로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이면서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좋소. 당신 손에 패했으니 이 서정용은 약속대로 청설루에 들어가 백 번 천 번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루주의 분부를 받들겠소. — 당신이 쓰러지는 날까지!"
콜록, 콜록.
소억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끊임없이 기침했다.
"그 말은, 언젠가 내가 제일 강한 사람이 아니게 된다면, 그러니까 당신 손으로 나를 죽일 수 있게 되거나 다른 누군가가 나보다 강해지면 곧바로 배신하겠다는 뜻이오?"
"하... 설마 나를 믿을 생각이었소? 당신이 나를 믿지 않는다면 배신이라고 할 수도 없지!"
주인은 쌀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희미하게 비웃음이 담긴 웃음이었다. 주인은 시선을 들고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쓰러트린 사람을 쳐다보았다.
"더구나 혈미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서 가장 강한 자뿐이오. — 만약 당신이 다른 이에게 쓰러진다면 당연히 당신을 떠나야겠지!"
"음... 그렇소? 기억해두지."
소억정은 가볍게 기침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소 여성스러운 그의 눈동자에 차갑고 흐릿한 빛이 반짝거렸다.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쾌도를 좋아하지. 비록 손을 벨 위험이 있다 해도 말이오."
주인은 알지 못했다. 그때 루주의 눈동자가 내내 향하던 곳은 옆에 선 나무 위에 갓 피어난 진홍색 들장미라는 것을.
"만약 당신이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당신을 죽일 것이오. — 반대로, 만약 내가 더는 쓸모없어지면 당신도 나를 제거할 수 있소."
주인은 차갑게 말했다.
"이게 바로 우리의 약속이오."

...중략...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주인도 그저 그가 쥔 검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그저 살인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명검을 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래서 유난히도 아끼는 것이겠지.
"만약 당신이 가장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당신을 죽일 거야. 만약 내가 당신에게 쓸모없어지면 당신도 나를 죽여."
"그러지. 언젠가 네 손으로 나를 죽이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내 모든 것을 네게 넘겨주마."
이 무정하고도 냉정한 약속은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장사치 두 사람이 체결한 계약에 불과해보였다.
"당신이 병으로 죽으면?"
"소억정은 싸움터에서 죽을 뿐 침상에서는 죽지 않는다."
마치 생사를 초탈한 사람처럼, 그의 대답은 냉랭했다.
"만에 하나라도 그리되면?"
주인은 물러서지 않고 계속 물었다.
"그리되면... 부디 내 대신 청설루 제자들을 잘 보살펴주어라. 적어도 사방에서 날아드는 벌떼들에게 도륙당하지는 않도록."
잠깐의 침묵 끝에 나온 그의 대답이었다. — 그가 부하를 향한 관심과 온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무력으로 무림을 강제로 굴복시켜온 자가 처음으로 자신이 떠난 뒤를 걱정하고 있었다.
"물론, 네 스스로 루주 자리에 올라 가장 강한 자가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새로운 후계자가 나타날 때까지 나를 대신해 그 자리를 지킬 수도 있다."
주인은 희미하게 냉소를 지었다. 주인의 웃는 얼굴 위로 지금껏 한 번도 떠오른 적 없었던 슬픔을 발견하고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슬픔은 차가운 빗속에 피어난 빨간 장미처럼 가녀리고 냉담하면서도 경계심에 가득 차 있었다.
“소 루주께서 그런 말을 할 줄이야…”
그녀는 웃으면서 물과 같은 내 검날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쓰다듬는 바람에 나는 주인의 손에서 피가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 주인의 심리가 불안정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평소 나와 마음이 통할 때와는 달리 주인의 손가락은 끊임없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냉담했다.
“하지만 내게 무슨 자격이 있지? 나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어. 그저 당신의 부하에 불과하지. 하물며 남초도 건재하고, 내 아버지는 혈마지. — 남들은 내가 루주가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걸.”
루주는 대답이 없었다. 문득 그가 손을 뻗어 살며시 나를 잡았다.
— 나는 경악했다. 뜻밖에도 주인이 그 손길을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다.
10여 년 만에, 나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 손에 잡혔다. 그의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몸체를 어루만지자 나는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 이 얼마나 강력한 통제력과 살기와 매력이 담긴 손인가… 심지어 나는, 내가 이 손에 들어가면 주인의 손에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색다른 풍모를 드러낼 수 있으리라는 것까지 눈앞에 그릴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의 소매 속에 든 석영도가 부러워졌다. — 저 녀석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날이면 얼마나 괴로운지 알면서도.
“그렇다면, 내게 시집오너라, 아정!”
그는 식지로 나를 가볍게 퉁겨 내가 반응하며 내는 소리를 듣다가 그 여음 속으로 불쑥 한마디를 섞어 넣었다.
“내 아내가 되어, 내가 죽은 뒤 정정당당하게 내 모든 것을 이어받아라.”
주인의 손을 벗어나면, 나는 주인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늘 냉담하던 주인의 낯빛이 순식간에 싹 바뀌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 장미같이 붉은빛이 주인의 뺨 위로 떠올랐다.
청설루주가 엎드려 구혼하게 만드는 사람이라니. 그런 사람은 이 넓은 세상에 아마 내 주인밖에 없으리라…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서로가 아니라면, 이 두 사람은 이보다 더 잘 맞고, 이보다 더 대등한 능력을 가지고, 이보다 더 함께 일생을 보낼만한 사람을 찾지 못할 테니까.
나는 그의 손에 잡힌 채 흡족하게 생각했다.
“아니.”
갑자기 주인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들려왔다. 그녀는 황홀감에 젖어든 눈빛을 하고도 중요한 한마디를 애써 입밖에 냈다.
나를 쓰다듬던 손이 우뚝 멈췄다. 그 순간, 나는 억누를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 그런 연후에야 소 루주가 담담하게 묻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어째서?”
“그건…”
주인은 여기서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나는 주인 역시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과부가 되고 싶지 않으니까.”
마침내 주인이 대답했다. 장밋빛 뺨은 빠른 속도로 창백해졌고, 맑은 눈빛 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물결쳤다.
“나는 그 누구를 위해서도 울고 싶지 않아.”
피.
내 몸이 부르르 떨렸다. 갑자기 몸을 타고 흐르는 따스한 피가 느껴졌다! “아… 이런. 내가 불치병에 걸린 환자라는 것을 잊었군…”
루주는 갑자기 기침을 시작했고 창백한 뺨 위로 불그스레한 병색이 번졌다. 그는 희미하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실례를… 미안하다.”


아주 일부분이지만 어찌나 비장미가 철철 흐르는지. 요즘 스타일에 맞지 않게 호흡이 아주 느린 편이어서 젊은 세대에게는 잘 먹힐 것 같지 않지만, 나는 옛 세대여서인지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 처절함에 소름이 끼쳤다. 서정용은 부모를 잃고 비정한 강호에서 홀로 살아야 했고, 아버지의 검으로 제일 처음 사람을 죽일 때 "그 누구를 위해서도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세상에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니 똑같이 아무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고 살겠다고 생각했지만, 소억정을 만났고 그와 함께 일하면서 그에게 흔들린 것이다.
하지만 일단 서술 스타일만 봐도 두 사람의 이야기가 비극으로 끝날 것이라는 감이 온다. 위에서 언급된 "남초"는 청설루 3령주로, 훗날 제4대 루주가 되는 사람이다. 드라마에서는 소억정의 사형으로 등장하는데 이 설정이 원작과 같은지는 모르겠다. 

<청설루>는 시리즈다 보니 각 인물의 서사가 모두 있고, 그렇기에 서로의 연결 관계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재미도 있다.
당당왕에 들어가 보니 드라마 덕분인지 창월의 작품들이 인기순위 상위권에 우르르 올라가 있던데, 언젠가 우리나라에도 나오려나?

다음엔 이 남자를 파악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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