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야방>과 유사한 작품을 찾다가 발견했는데, <랑야방>이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오갈 정도로 캐릭터 설정이 유사하다.
전체 내용은 보지 않았지만, <랑야방>과 <일대군사>는 주제 의식이나 분위기가 아주 다르다. <일대군사>의 주인공은 매장소보다는 린신, 그 보다는 <녹정기>의 위소보에 좀 더 가까운 캐릭터라 전체적인 분위기가 훨씬 가볍고 장난스럽다. (끝까지 읽어봐야겠지만... 위소보에게도 위소보만의 고뇌가 있듯 세상에 늘 웃는 사람이라고 해서 깊이가 없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하지만 캐릭터 설정이 유사한 것은 인정한다. 여기 맛보기로 소개한 부분에서 주인공이 쇠뇌로 자객을 쏘아 죽이는데, <랑야방>을 읽었다면 유사한 부분을 떠올릴 수 있을 거다.
일단 매장소가 정치판에 뛰어들면서 쓴 가명 소철(苏哲)이 강철(江哲)과 같다. 무공을 하지 못하지만 머리가 좋고 책략이 뛰어난 점도 유사하다. 또, 둘 다 어떤 왕을 도와 태자를 물리치고 황위에 올린다. 하지만 매장소에게는 숨겨진 과거가 있고 복수라는 목적이 있는 반면 강철은 그냥 어쩌다보니 정치판에 끼어들어 살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이란 점이 다르다.
두 사람 다 무공을 모르기 때문에 무공이 높은 호위 무사가 있다. 매장소에게는 비류가, 강철에게는 이순이. 비류는 지능이 낮고 이순은 내관이라서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점도 유사하다.
기왕 소경우/정왕 소경염과 옹왕 이지/제왕 이현
소경우와 이지는 둘 다 문무겸비한 왕이지만 뜻을 펼치지 못하고 죽는다. 소경우는 아버지의 미움을 사 억울하게 죽지만 이지는 전사하는 것이 다르다. 소경염과 이현은 형의 뒤를 잇지만 형만큼은 못하다는 설정이다. 그래도 매장소가 없었다면 소경염이 황위를 차지하지 못했겠지만, 이현은 강철이 없어도 황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예황 군주와 가평 공주 임벽/홍하 군주 임동
예황 군주의 역할을 임벽과 임동이 나눈 것 같다. 예황 군주와 임벽은 둘 다 뛰어난 장수이고 똑같이 뛰어난 장수와 혼약을 했지만 짝이 전사한다. (슬프지만 임수는 매장소라는 전혀 다른 인물이 되었으니 전사한 것으로 보자) 임벽은 이현과 혼인하기 때문에 이 글을 쓴 사람은 예황 군주가 소경염과 혼인할 것이라 예상했다고 한다. 나도 어디선가 그런 예상 글을 본 것 같은데...
임동은 예황 군주의 '군주'의 역할이다. 예황 군주가 아버지가 전사한 후 군을 이끈 것처럼 임동도 아버지(?) 사후 군을 이끌어 국경을 지키는 모양이다. 섭탁이 변장을 하고 예황을 도운 적이 있듯, <일대군사>에도 적기라는 사람이 변장을 하고 임동과 함께 싸운다고 한다.
언예진과 하후원봉
둘 다 멋지고 소탈한 공자. 무공도 뛰어나고 유명 문파의 가르침을 받은 것 같다. 게다가 똑같이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자의 비무초친(신랑감 구하기 대회)에 참가한다. 요 부분은 별로 비슷한 것 같지 않지만, 언예진같은 풍류 공자 캐릭터가 나오는 것이 반가워서 써봤다.
활족과 봉의문
둘 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영리한 미녀들이 이끄는 조직. 그렇지만 둘 다 주인공 손에 무너진다.
서장
“훌륭한 그림일세. 희뿌연 물안개 속 외로운 배 한 조각이라. 필법도 걸출하군.”
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칭찬한다.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추태를 보일 수가 없다. 선물을 받았다고 펄펄 뛰며 기뻐하기엔 남들 눈이 신경 쓰인다.
나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은 손가락만 까딱해도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반면, 때로는 모르는 척 하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폐하께서는 아직 정정하시지만 아무래도 일흔을 넘기셨고, 내년에 황태손(皇太孙)께 선위하신다는 소문도 있다. 만에 하나라도 말년에 정신이 오락가락해져, 오랫동안 보필해온 내게 의심을 품기라도 한다면? 나는 곱게 죽고 싶은 사람이다.
선물을 준 중년의 류정(刘祯)은 이런 내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운 듯 조심조심 묻는다.
“공(公), 노년인 아버지께서 정신이 맑지 못해 쓸데없는 글을 쓰셨나봅니다. 같은 해 급제하시고 같은 분을 모신 정을 보아, 아버지께서 말년을 편히 보내실 수 있도록 한 두 마디라도 답을 좀 해주십시오.”
눈앞에 있는 류정의 아버지 류괴(刘魁)는 나와 나란히 진사에 급제했다. 내가 장원(状元, 과거의 수석 급제자), 류괴는 방안(榜眼, 과거의 차석 급제자)이었지만, 솔직히 말해 구성이 치밀하고 고증을 상세히 곁들인 그의 문장에 감탄해마지 않았었다. 완고한 성격 탓에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주인을 섬기지 않음)을 부르짖지만 않았다면, 새 왕조에서 한 자리 차지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얼마 전에 그가 <남조초사(南朝楚史)>를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데 여태 소식이 없던 터.
류정이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품에서 보따리 하나를 꺼낸다. 풀어보니 연푸른색 겉면에 ‘남조초사’라는 네 글자가 커다랗게 씌어 있다. 방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 들뜬 마음으로 책을 펼친다. 단숨에 읽어 내리고 나자 절로 쓴웃음이 난다. 과연 문거는 눈곱만큼도 내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
나는 맥없이 책을 내려놓고 느릿느릿 말한다.
“조카, 일단 돌아가 있게. 이 일을 어떻게 할지는 내 깊이 생각해보겠네. 조카도 알다시피 이 늙은이도 정사(政事)에 손 뗀지 오래라네.”
류정을 보낸 후 나는 큰 소리로 소순자를 부른다.
“소순자(小顺子)! 소순자!”
문 밖에서 푸른 적삼을 입은 노인이 들어온다. 겉보기에는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로 보이고 청수한 외모에 수염 하나 없는 뽀얀 얼굴을 했지만, 오십년 넘게 나를 따른 심복 이순(李顺)이다. 그는 남초의 환관이었는데, 무예가 절륜하여 거의 종사(宗师, 무리를 이끄는 사람) 급이라고 들었다. ‘들었다’라고 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내가 무예에 대해 거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중년처럼 보이니 그 소문이 사실이겠거니 한다.
한 때 이순같은 고수가 닭 한 마리 잡을 힘도 없는 나 같은 서생에게 충성을 바칠 리 없다고 생각한 누군가가 그를 매수하려 한 적이 있다. 그 자가 얼마나 참담한 꼴이 되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말했다가는 역겨워서 밥이 안 넘어갈지도 모르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류괴는 남초의 유신(遺臣)일세. 좀 심한 말을 해도 그러려니 할 것이지, 대신들은 왜 그렇게 난리들인가?”
이순이 웃으며 대답한다.
“어르신, 잊으셨습니까? 내년이면 황태손이 즉위합니다. 태자비가 어르신의 따님이신데 이런 때 누가 어르신을 거스르고 싶겠습니까? 류괴야 워낙 고집불통이니 꼬장꼬장하게 어르신을 2신록(2臣录, 여기까지만 봐서는 의미 불명확, 두 나라를 섬긴 변절자를 의미하는 듯)에 올려놓았겠지요. 어르신은 괜찮다하셔도, 태자비와 황태손의 위신을 무시할 수야 없잖습니까.”
“하긴!”
나도 퍼뜩 깨닫는다. <남조초사>에서 류괴가 나를 두고 ‘속을 알 수 없고 교활하고 꾀가 많다’라고 썼지만, 내가 정치 흐름에 둔감하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다. 소순자의 조언과 위험 회피에 탁월한 내 처세술이 아니었다면 벌써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태연하게 말한다.
“가서 유람(柔蓝, 주인공인 강철의 딸이자 태자비)에게 류괴는 얼마 남지 않은 남초의 유신이니 굳이 건드릴 필요 없다고 전하게. 류괴가 가만히 있어도 누군가가 또 나설 게야. 그가 쓴 <강수운 전(江随云 传)>이 다소 신랄하긴 하지만 어쨌든 사실 아닌가. 그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악담을 지어낼 걱정도 없고, 내 개인의 이야기니 황태손까지 말려들 리도 없네.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하게.”
듣고난 소순자가 공손히 물러간다.
나는 곧 다시 흥미롭게 <강수운 전>을 펼쳐 읽는다. 사람을 평하는 것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나 하는 것이고 나는 아직 멀쩡히 살아 있지만, 미리 봐둔들 어떠랴
현덕(显德) 16년 정묘년(丁卯年), 황제께서 미양(微恙, 가벼운 병)이 드시다. 가을에 이르러 차도가 있어 은과(恩科, 경사를 축하하기 위해 임시로 치르는 과거)를 베푸니, 강남 선비들이 기쁨에 겨워 구름처럼 몰려 들다. 팔월 십오일 금방(金榜, 과거 급제자 명단)이 나 붙으니, 장원은 가흥(嘉兴) 출신 강철(江哲)이다. 당기(當期, 그 때)에 강철의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아 제상(諸相)들이 묻고 물어 그를 알아내다.
강철, 자(字)는 수운(随云). 동원 4년 무신년(戊申年)에 태어났다. 그 아비 강모(江暮)는 자가 한추(寒秋)로, 한빈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글이 우아하고 멋스러워 그 덕으로 세가의 딸을 처로 맞아 들였다.(이 부분 원문이 조금 이상함) 그는 난세에는 뜻을 이룰 수 없다 여겨 출사(出仕, 관직에 오름)하지 않고 종일 아들을 가르치고 책을 읽었다.
현덕 8년 말, 가흥에 역병이 돌아 그 처가 병사하고, 오래지 않아 한추는 사소한 다툼으로 처의 집안과 절교하여 병든 몸으로 아들만 데리고 멀리 여행을 떠났다. 강하(江夏)에 이르러 한추의 병이 깊어지자 수운은 아비의 치료를 위해 의성(医圣) 상신(桑臣)을 찾아갔고, 상신은 아는 것이 많고 기억력이 좋은 수운이 마음에 들어 온힘을 다해 도왔다. 얼마 후 한추의 병에 차도가 있자 상신은 강북으로 떠나고 수운은 아비의 수발을 들며 강하에 남았다.
현덕 10년 임술년, 한추가 병사했다. 그가 남긴 <청원집(清远集)> 열 두 권은 우아하고 참신하여 사람들이 몹시 아꼈다.
한추가 세상을 떠났을 때 수운은 빈곤하여 장사를 지낼 돈이 없었다. 당시 강하를 지키던 진원후(镇远侯)가 아들의 스승을 구하기에 찾아갔다. 진원후는 아직 어린 그가 믿음직스럽지 않아 글을 지어보게 하였다. 수운은 그 자리에서 붓을 휘둘러 단번에 <추수부(秋水赋)>를 써내려갔다. ‘잠시 후 달이 동산 위에 떠올라 두성(斗星, 북두칠성)과 우성(牛星, 견우성) 사이를 배회하니, 흰 이슬 강을 가로지르고 불빛은 하늘에 닿았노라. 일엽편주 가는대로 아득히 넓은 강을 건너니, 드넓구나, 바람을 타고 나는 듯 멈출 곳을 모르고. 훨훨 나는구나, 홍진을 떠나 나 홀로 신선인가 하노라. (소동파의 <전(前) 적벽부>인데 이 소설에는 주인공 강철이 쓴 것으로 둔갑)’라는 글귀에 진원후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 사례하고 세자를 불러내어 스승을 삼도록 하였다--
1장 곤궁한 서생(書生)
남초(南楚) 현덕 16년, 천하는 여전히 혼란에 빠져 있었으나 상황은 불보듯 명확했다. 장강(양쯔강) 이남은 남초가 점령했고, 장강 북쪽은 대옹(大雍)의 세상이다. 강하는 대옹의 방어 요충지로, 강하를 지키는 진원후부 역시 군사 요충지다. 때문에 밤낮없이 경계가 삼엄해서 나처럼 제법 지위가 높은 식객도 함부로 나다니지 말고 순순히 서재에 들어앉아 있어야 사고를 피할 수 있다.
나는 언제쯤 밥을 주려나 하며 책을 뒤적이는 중이다. 뭐, 어쩔 수 없다.
진원후 육신(陆信)은 군부의 대신이기 때문에 남초의 관례대로 가족들은 수도인 건업(建业, 현재의 남경. <랑야방>의 금릉과 같은 곳)에 남아야 한다. 열 다섯 살 먹은 세자 육찬(陆灿)만 시위로 삼아 곁에 두고 있는데 조정에서도 허락한 일이었다. 육찬은 내게 글을 배우고 있지만, 장군 가문 자제이니 군사학도 모른 척 할 수 없다. 오늘은 강하 대도독 육신이 군사회의를 소집한 날이라 육찬도 그 자리에 참석했고 나는 여기 서재에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다. 같이 식사를 하려했는데 어찌된 셈인지 점심 때를 넘겼는데도 회의가 끝나지 않는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도 배를 곯고 있는데 나같은 식객이 먼저 배를 채우면, 배고픈 육찬이 시기심을 못 이겨 펄펄 뛸 것이 분명하다. 그뿐이랴, 때를 기다렸다가 복수까지 하겠지. 그러니 기다리는 수밖에.
나는 꺼진 배를 달래며 어쩔 수 없이 한숨을 푹 쉰다.
아비와 아들이 어쩜 그리도 다른지. 육신은 관대하고 포용력이 있는 반면 육찬은 좀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한번은 그가 육신에게 야단을 맞는 것을 보고 피식 웃은 적이 있는데, 그걸 꽁하게 새겼다가 이튿날이 되자 삼년 상도 끝났으니 밖에 좀 나가보라며 나를 꼬드겨 연월루(烟月楼, 기루인 듯)로 데려갔다. 눈치 빠르게 내뺐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동정을 뺏길 뻔 했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무료하게 책을 뒤적인다. 에휴, 진원후부의 서재는 장서(藏書)가 제법 풍부하지만, 삼년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거의 다 읽었고 장군 가문이라 그런지 비교적 쉬운 책들이 많았다. 아무래도 책방에 있는 책을 통째로 사온 것 같다. 그러니까 달력까지 갖춰놓고도 진짜 진귀한 서적은 찾아볼 수도 없지.
해 그림자를 보며 시간을 가늠해보는데, 육찬의 시종인 육충(陆忠)이 찾아와 군사 회의는 끝났지만 육신이 수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육찬도 함께 하게 됐으니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전해준다. 나는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음식이 식었건 말건 게걸스레 먹기 시작한다. 한창 맛있게 먹을 때 갑자기 대청이 소란스러워진다. 처음에는 모르는 척 했지만, 소란이 점점 커지더니 누군가 귀청이 터질 것처럼 큰 소리로 외친다.
“잡아라! 자객이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다. 아뿔싸. 이곳에 자객이 나타났다면 십중팔구 진원후를 노릴 것이다. 진원후는 바로 내 목숨줄이란 말이다. 자객에게 죽으면 안된다.
그래도 내게는 진원후를 보호할 힘이 없으니 숨는 편이 낫다. 마음이 불안해서 서재에 있는 정교한 쇠뇌를 꺼내 든다. 남초의 공부(工部, 제작/공사를 맡은 부서)에서 공들여 제작한 쇠뇌로 사정거리가 백 보나 되고 화살을 연속 다섯 발 발사할 수 있다. 본래는 육신이 육찬에게 준 선물이지만, 육찬은 쇠뇌를 쓰는 것은 비열한 짓이라며 별로 애용하지 않았다. 나야 고맙지. 무공을 할 줄 몰라 활은 꿈도 꾸지 못하니, 이 쇠뇌야말로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화살을 얹고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밖을 살핀다. 내가 있는 이 서재는 대청에서 그리 멀지 않아 번쩍이는 창칼이 훤히 보인다. 붉은 옷을 입은 군사 한 무리가 하인 차림을 한 남자 둘을 에워싸고 공격하는 중이다. 얼마 안 있어 진원후 육신이 부장들과 함께 달려온다. 오른팔을 감은 붕대에 거무스름하게 핏자국이 묻어 있다. 평소 그의 곁을 지키는 시위 육평(陆平)은 어디로 갔는지 창백해진 육신을 부축하고 있는 것은 육찬으로, 몹시 화난 얼굴이다. 상황을 보아하니 저 자객들은 몰래 진원후부에 잠입했다가, 육신이 연회를 베풀자 음식을 나르는 하인으로 위장해 암습을 한 모양이다. 육평은 십중팔구 주인을 구하려고 순직했으리라.
잔뜩 흥분하여 지켜보는데, 갑자기 자객들이 눈짓을 주고받더니 품에서 시꺼먼 구슬을 하나씩 꺼내 땅에 휙 내던진다. 삽시간에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라 주변 십여장을 뒤덮는다. 바로 그 때, 나는 육신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 편장(偏将, 가장 지위가 낮은 장군) 복장을 한 사람이 눈에 흉광을 번뜩이며 슬며시 소매에서 비수를 꺼내는 것을 발견한다. 나는 아차 싶어 황급히 소리를 지른다.
“대인, 조심하십시오!”
외침과 동시에 쇠뇌도 발사한다. 참혹한 비명이 들린다.
연기가 사라진 뒤 혼비백산한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보니, 자객들은 여전히 포위된 상태이고, 육신의 뒤에 편장 한 명이 가슴에 화살을 맞고 널브러져 있다. 그의 손아귀에는 비수가 꽉 쥐어져 있는데 독을 묻힌 듯 푸르스름하게 빛을 내는 비수 끝이 육신에게 거의 닿을락말락 할 정도로 가깝다. 장님이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자객들이 포위를 뚫지 못해 필사적으로 싸우다 죽자, 육신은 부장들에게 처리를 맡기고 집무실인 백호당으로 나를 불러 복잡한 표정으로 말한다.
“수운, 구해주어 고맙네.”
“대인께서 복많고 덕이 높아 간사한 무리의 암습을 피한 것입니다. 소생은 요행히 맞힌 것 뿐이지요.”
내가 겸손히 대꾸하자 육신은 의심스레 묻는다.
“그 자가 나를 암습한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겠지. 물론 내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이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이건 내 목숨을 지켜주는 비장의 무기니까.
나는 나면서부터 남들보다 오감이 월등히 뛰어났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백 보 안에서 낙엽지는 소리를 듣고, 몇 리 밖의 모래알을 보고, 혀에 갖다대기만 하면 재료가 무엇인지 알고, 체취 하나로 십리까지 쫓을 수 있다. 가끔은 나도 내가 사람이 맞나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면 부럽다못해 시기를 할 테니 아무에게나 떠벌리면 안된다. 이 놀라운 능력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빼면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거짓말로 대답한다.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습니다. 소생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쇠뇌를 들었는데, 자객들이 연기를 일으키자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이 제아무리 날고 기는 능력이 있다한들 그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하늘에 오르기만큼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연기를 피운 것은 다른 누군가에게 손을 쓸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하여 소생은 그들의 동료가 대인 근처에 숨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당시 대인 뒤에는 아무도 없었으니 자객이 공격을 한다면 그쪽을 노리겠다 싶어 아무렇게나 쇠뇌를 쏘았는데, 대인의 복에 힘입어 운 좋게 자객을 맞힌 것입니다.”
육신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놓아준다.
얼마 후 육신을 죽이려던 자들이 대옹의 자객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 편장을 매수하여 진원후를 죽이고, 강하가 사령관을 잃고 허둥지둥할 때 공격을 하려던 것이다. 그런데 철두철미한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대옹의 대군도 물러갔다.
육신은 내가 영리하고 꾀 많은 것을 알고 막료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이곳 강하는 강만 건너면 대옹의 땅이라 전투가 잦기 때문에 단 한 번이라도 패배하면 수습할 방법이 없다. 게다가 내가 육신을 돕는다는 것을 대옹이 알아내고 자객이라도 보내면 어쩌란 말인가. 그래서 거절하기로 한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야 없으니, 아버지께서 생전에 뜻을 펼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러워 하셨기에 과거에 응시하기로 했다는 핑계를 댄다. 그럴싸한 이유여서 아무도 나를 막지 못한다. 육신은 내 고향인 가흥으로 사람을 보내 대신 과거에 응시할 자격을 얻어 준다. 그리고 은과가 열리기 두 달 전에 여비를 챙겨 과거가 열리는 건업으로 보내준 것은 물론, 내 신변을 지키기 위해 군수품 담당자들까지 딸려 보낸다.
강철이 매장소보다 계략이 뛰어나다는 평이 있고, 또 본래 목적이 복수도 아니거니와 제목도 일대 '군사'인만큼 전쟁에서 재미난 책략들이 펼쳐질 것 같다. 삼국지 느낌이 날까 기대한다.
찾아보면 올해 드라마도 방영한다고 되어 있던데, 정보가 전혀 없는 걸로 보아 헛소문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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