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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맛보기

청설루, 청람의 이야기

by 와룡 2019. 6. 16.

청설루 드라마 초반부를 보면 남주인공이 아닐까 오해하게 되는 남자가 한 명 있다.
바로, 백제의 대제자인 청람, 이 남자.

다정한 남자, 청람. 첩자까지 잘 보호해준다

언제든지 스포가 나올 수 있다.

<청설루> 드라마에서 여주인공인 서정용이 부모를 잃고 세상 믿을 사람 없다고 고통스러워할 때, 허약한 몸으로 밤새 곁에 있어준 소억정 외에도 제 몸을 날려 그녀를 보호해준 사람이 바로 청람이다. 그의 진실한 호의와 무공을 보고 서정용은 그를 따라 백제 문하에 들어가기로 한다. 즉, 어린 시절 서정용과 엮인 남자가 둘이었다는 것.

무협 소설이라면 으레 그렇듯,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대사형과 소사매는 썸이 있기 마련. 서정용(백제 문하에서는 청명)과 청람 역시 애틋한 마음을 서로 키워나간다.

드라마 <청설루>에 따르면, 청람이라는 이 남자는 서정용에게만 다정했던 게 아니다. 본래 타고난 다정남인 듯 진남 왕세자를 보호하러 온 묘족 여자 엽화에게도 어찌나 잘해주는지 엽화는 곧 그에게 정을 느낀다. 청람, 서정용, 엽화가 침사곡에서 슬쩍슬쩍 보이는 삼각관계에서도 딱히 단호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것을 잘 보라.
비록 다정남인 데다 잘 생기기도 했지만, 우리의 남주인공은 소억정이기 때문에 청람은 곧 세상을 뜰 운명이다.

백제는 서정용을 제자로 삼을 때부터 그녀의 운명이 불운을 부르는 명성과 이어져 있다는 걸 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서정용의 운명 탓이 아니라 다정남 청람이 무턱대고 엽화를 믿고 침사곡에 데려온 탓이지만, 이는 일단 드라마의 설정이라고 치부하기로 하자.

엽화는 사실 배월교 교주의 딸 명하로, 어머니의 명을 받아 침사곡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아내기 위해 잠입한 첩자였다. 침사곡에 백제와 제자 셋 밖에 없는데도 머릿수 많은 배교가 손대지 못한 까닭은 그 입구가 숨겨져 있고 다양한 기문둔갑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엽화가 그 비밀을 알아낸 덕분에 배교가 쳐들어온다.

첩자 엽화
사실은 배월교주의 딸 명하
침사곡 입구. 이렇게 눈에 띄게 생긴 곳인데 왜 입구를 못 찾는다는 거지?
침사곡으로 쳐들어온 배월교. 흑풍회가 연상된다.
배월교주 화련과 배월교 좌우 호법. 인사 방식은 <의천도룡기>의 명교와 비슷. 명교도 배화교라고 부를 수 있으니 이름마저 비슷하다

그러잖아도 자신의 운명이 사람들을 해친다는 것을 엿들은 서정용은 아버지의 유품인 혈미검과 혈미검보를 찾아 침사곡을 떠나려던 참이었는데 막 쳐들어온 배교와 맞닥뜨린다. 여기서 지난번 쓴 글에서 소개한 원작의 서정용을 볼 수 있다. 아무리 찌르고 또 찔러도 쓰러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여자.

드디어 아버지의 혈미검을 찾다
찔려도 굴하지 않는 불굴의 서정용
백제 할아버지의 무술

그리고, 백제 할아버지와 배교주의 마지막 결투가 벌어진다. 백제 할아버지는 뜻밖에도 무술 폼이 제법 난다. 배교가 화약을 쓰는 바람에 화려한 액션보다 다소 어색한 폭발 장면이 더 많아서 아쉽지만.

참, 나는 청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

여전히 다정한 청람은 침사곡을 이 지경으로 만든 명하를 죽이고자 하지만, 그녀가 자신을 구하려고 했다는 진심을 털어놓자 결국 죽이지 못한다. 백제 할아버지도 죽은 마당에 그 누가 배교를 이길 수 있을까 싶지만, 청람은 자신이 뒤를 끊을 테니 사제와 사매더러 먼저 도망치라고 한다. 배교주가 심복인 좌호법의 생사도 아랑곳하지 않고 화약을 쏟아부으면서 관성대에 있던 모든 이들이 처참한 죽음을 맞는다.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죽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청람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다

모두가 청람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명하가 그를 구했다. 치료 도중에 기억을 잃은 청람은 가야라는 이름으로 배월교의 사제가 되어 명하와 함께 한다. 훗날 기억을 되찾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진행될는지 궁금하다.

청람을 구하는 명하

드라마와 달리 원작 소설 속의 청람과 가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인물이라고 하기가 뭣한 것이 사실 가야는 배월교 특유의 사술을 통해 만들어낸 괴물로, 드라마에서도 이미 혈마와 맥천성이 배월교주 화련에게 당해 그런 모습이 된 적이 있다. 자의식 없이 배교주의 조종을 받는 괴물이던 가야는 명하의 부름을 받아 의식을 얻으면서 명하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 그러다가 묘족의 공격에 중상을 입은 서정용을 살리려는 청람과 거래하여 청람을 삼키고 그 기억과 힘을 얻는다.

정리하자면, 가야는 자신만의 의식이 있으면서 청람의 기억과 감정을 공유하는 몸이며, 청람과의 약속 때문에 청명을 보살폈을 뿐, 청명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배월교 사제 가야

원작 소설의 일부를 보면 청람과 가야가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다.

창월 작, <호화령護花鈴> 일부


"그래, 청람은 이미 죽었다. 가야는 청람이 아니다."
어느덧 양갈래 머리를 했던 소녀에서 절세 미녀로 자라난 명하를 바라보며, 백의의 사제는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나지막한 소리로 불쑥 말했다.

"— 가야, 명하의 가야. 20년 전에도, 20년 후에도, 항상 명하 한 사람만의 가야."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를 삼켜 지고무상한 힘을 얻었고, 피와 살로 된 육체를 만들었다. 되살아난 귀항鬼降(시체 혹은 살아 있는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든 것)은 배월교의 사제가 되었다. 구리거울 속에서, 그것은 새로 얻은 자신의 육체를 바라보았다. 영준하고 젊은 백의의 사제.

"어머나! 가야?"

그것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명하는 놀라고 기쁜 목소리로 외치며, 치마를 걷는 것조차 잊고 달려가다가 그만 발이 엉키고 말았다.  하지만 넘어지기 전에 그것이 바람처럼 날아와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손이 그것의 손을 잡자 악력과 온기가 느껴졌다. — 문득 귀항이 웃음을 지었다. 그것, 아니, 그에게도 마침내 자신의 손이 생겼다. 성호聖湖 기슭에서 만난 그 여자아이를 만질 수 있는 손이. 그녀가 웃을 때, 그녀가 수심에 잠길 때, 그녀가 눈을 찡그릴 때, 그는 항상 그녀의 곁을 지켰다. 그녀를 위해 그녀의 교단과 그녀의 백성을 지키고, 그녀가 영원히 화를 입지 않게 하는 것.

— 그것이 그의 바람이었다.

청람... 청람. 보이느냐? 그녀가 울고 있다. 너의 명아가 울고 있다.

하지만 너는... 너는 어디에 있지? 너의 감정을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으리라. — 심지어 눈앞에 있는 저 사람, 그녀조차 전부 알지 못한다. 그때 그녀는 너무 어렸다... 너무 어려서 자신이 어떤 보살핌을 받고 어떤 정을 입었는지 명확히 알지 못했고, 너의 마음속에 자리한 그 깊고 무거운 감정도 알지 못했겠지.  청람, 너에게는, 너의 그 피로 그녀의 눈물 한 방울 대신하는 것도 아깝지 않은 일이었던가? 그렇기에 내 기억 속에 깊이 잠든 너는 내 손을 빌려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는가?

하지만, 그럴 수는... 그럴 수는 없다. 청람, 나는 가야다.

이 이름을 가졌기에 자아를 가진 귀항.

청람, 너에게는 네가 지켜야 할 것이 있으나 나에게도 나 자신의 것이 있다.  나는 이미 네 바람을 이루어주었다. 네 눈으로 그녀가 무사히 남강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았고, 10년 후에 그녀가 돌아와 너를 다시 만나는 것도 보았다... 너는 만족해야 한다.

— 이제, 내 차례다. 내 바람을 이루고 내 염원을 지킬 때가 아니더냐?


드라마에는 가야와 청람을 한 인물로 설정했고, 명하가 청람을 사랑해서 가야를 만든 것으로 엮이지만, 원작에 따르면 명하-가야, 청명-청람의 사랑이 서로 다르다. 그렇다고 해도 청람이 가야의 의식을 점점 지배하게 되면서 가야의 마음속에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원작에서 혹은 드라마에서 가야가 청람으로 돌아오는지는 천천히 알아보기로 하자.

지난 글에서 서정용이 어려서 혼자 떠돌았다고 썼는데, 알고 보니 이는 백제 문하를 떠난 후부터였다.

부모를 잃은 후 백제의 문하에서 사부와 두 사형의 보살핌을 받고 자란 서정용이지만 자신과 얽힌 모두가 죽는 불운을 타고났고, 그로 인해 사부와 청람이 죽고 청우마저 떠나자 더욱 고독해져 다시는 누구를 위해서도 슬퍼하지 않겠다 맹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후에야 소억정을 만났다. 그러니 소설 속 그녀의 어린 시절은 드라마와 설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바이두 백과에서 가져온 서정용의 인생을 보면...

  • 5살에 원수의 공격을 받아 어머니를 잃다.
  • 8살에 아버지 혈마가 침사곡으로 가던 중 혈미검으로 자결하다. 혈미검을 들고 홀로 침사곡에 가서 청람과 청우를 만나며, 청명이라는 이름으로 백제 문하에 들다.
  • 12살에 백제가 오래지 않아 죽으리라는 명성의 예언을 입에 담다. 서정용이 붙잡히자 청람이 사매와 사제를 구하기 위해 가야에게 먹히다.
  • 13살에 청우와 함께 강호에 뛰어들다.
  • 15살에 청우가 실종되다. 3년에 걸쳐 혈미검을 들고 어머니를 공격했던 칠대문파의 고수 열한 명을 주살하여 혈마의 딸 이름을 천하에 떨치다.
  • 21살에 소억정을 만나 청설루에 들다. 소억정의 중용을 받다.
  • 22살에 벽력당 뇌씨 집안을 멸문하고, 훗날 풍우 조직의 수장인 추호옥이 되는 뇌초운을 풀어주다.
  • 23살에 고몽비, 지소태가 손잡고 일으킨 반란을 평정하고, 손수 고몽비를 죽이다.
  • 24살에 소억정을 따라 배월교를 무너뜨리고 가야와 마주치다.
  • 25살에 석명연의 이간질을 당해 소억정과 동귀어진하다.

사부와 사형의 희생으로 살아난 청우와 청명. 이제 청우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청명 홀로 강호를 떠돌다가 청설루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청우는 갈색옷을 주로 입었는데 청람이 죽은 후에 청색옷을 입은 것은... 사형을 기리는 걸까?

청우의 이야기는 또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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