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도중 출판 중단된 <복우번운>의 작가 황역.
<복우번운>은 사실 내 취향의 작품은 아니다. 뒤로 가면 좀 어떨지 몰라도 초반 분위기가 너무 무거운 느낌이라서다. 중후한 주인공도 다소 내 취향이 아니고.
황역은 고룡님 못지 않은 다작가인데다 작품 수준도 편차가 심하다. 판타지와 SF류에도 손을 대서 느낌은 좀 예광스럽다고나 할까?
<복우번운>, <대당쌍룡전> 등의 명작을 남긴 후 그의 명성은 점차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시 재기한 작품이 이 <변황전설>이다. 게다가 중국 남북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적인 분위기가 특히 내 주의를 끌었다. <헌원검> 이후로 워낙 좋아라 하던 시대 배경이었으니까.
황역 작품은 우리나라에 완간된 적이 없어서 모르는 사람도 꽤 많다. 그래서 새해를 맞아, 그의 작품 느낌이 어떤지 소개해보고자 한다.
나야 마음에 들지만 정통 무협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조금 지루한 시작이 될지도 모르겠다.
변황전설 - 황역
제1장 채찍을 던져 강을 끊다(投鞭斷流)
회수(淮水)와 사수(泗水) 사이에는 몇 백리나 되는 폐허가 있다. 귀신이라도 살 것처럼 황폐한 이 지역을, 남쪽의 한인들은 ‘변황(边荒)’이라 불렀고, 북방의 호인(胡人, 오랑캐)들은 ‘구탈(甌脫)’이라 불렀다. 명칭은 달랐지만 세상에 그 비할 곳을 찾기 힘든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주민들이 선량하고 물자가 풍부한 반면, 칼을 휘두르는 무뢰배들이 모여드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위험천만한 곳이지만 또한 기회가 넘치는 곳이기도 했다. 영웅호걸이 뼈를 묻는 장소임과 동시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이름을 드날리는 무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 곳은 각 지역의 정권이 비밀스러운 외교를 진행할 때 선택하는 이상적인 장소요, 몸을 의탁할 곳 없는 사람들이 피난을 오는 안식처였다. 어떤 때는 난세의 도화원이 되었다가 또 어떤 때는 아수라 지옥이 되기도 했다.
그 어떤 곳도 변황보다 두렵지 못했고, 또한 변황보다 사랑스럽지 못했다. 변황은 재능 있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곳이나 마찬가지였다. 이곳에는 색다른 생존의 철학과 법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이상한 존재는 오랜 역사의 흐름과 객관적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다. 그 역사에는 전사들의 선혈과 백성의 고난이 얼룩져 있었다.
한(漢) 왕조가 기울자 각지에 효웅이 할거하고 전쟁이 끝없이 이어졌다. 때문에 농사가 어렵게 되어 백성들은 기아에 허덕였다. 이런 악순환 속에 천년을 일군 농토에는 해골이 쌓이고 천리를 가도 밥 짓는 집 한 채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삼국시대 손씨의 오나라와 조씨의 위나라가 대립하는 동안 여러 번의 전쟁이 있었는데, 그 중 대부분이 회수와 사수 사이에서 벌어졌고, 그 중심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밭과 과수원이 황폐화되고 백성들은 이리 저리 흩어졌다. 집은 텅 비고 백리 안에는 사람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서진(西晋)의 사마씨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백성들도 안락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팔왕의 난’과 ‘영가(永嘉)의 화’가 잇달아 일어났고, 흉노(匈奴), 선비(鲜卑), 강(羌), 저(氐), 갈(鞨) 등 다섯 부족이 반진(反晋)의 기치를 올렸다. 역사의 거대한 폭풍은 국토의 작은 땅덩이마저도 온전히 남기지 않았다.
진나라 황실에서는 회제와 민제가 모두 몽진했다. 진 황실이 남쪽으로 쫓겨감으로써 남북대립의 국면이 시작되자, 회수와 사수 지역은 여전히 재난 가득한 전쟁터로 남았다. 회수와 사수가 남북 정권의 경계라는 것은 불문율이었다. 변황은 곧 양쪽 경계에 자리한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된 것이다.
이 미묘한 변황의 존재는 바로 이렇게 이뤄진 것이었다.
북방 유목민족 출신인 호인(胡人)들은, 두 부족이 인접할 경우 ‘구탈’이라는 일정 거리의 완충지를 남기는 것이 관례였다. 별 문제가 없으면 오랑캐나 한족도 그 곳에 들어가지 않으며 나그네도 길을 멈춰야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남방 정권 입장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적을 맞게 되는 이 지역에 백성을 남겨둘 수가 없었다. 해서 성을 높이 쌓고 그 외의 건물은 적이 이용할 수 없도록 모두 파괴하는 전략을 택했다. 이렇게 하면 몇 백리 내에서는 식량을 보급할 수 없으므로 오랑캐의 기마병이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괴상하고도 특이한 변황의 정세는 바로 이러한 남북 각 세력의 동의와 묵인 하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변황은 중국에서 가장 황폐한 지역이지만, 그 중심인 변황집은 모순적이게도 중국에서 가장 번창한 곳이었다. 이 변황집은 영수(颖水, 강이름)의 서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유일하게 남북운송로의 중심으로써 무역의 교량이 되었고, 천하 세력들이 권력을 다투는 장소이자, 밀무역자와 법을 어기는 무리들이 일을 벌이는 곳이기도 했다. 생명을 보존할 수만 있다면 상인이나 기녀, 대장장이 가릴 것 없이 누구든 타 지역에 비해 수백 배 정도의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덕분에 이곳은 마력과 같은 기이한 유혹이 가득한 곳이었고, 생존 능력과 행운을 갖춘 사람들에게는 안성맞춤인 땅이었다.이곳에서 왕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지역에 들어서는 순간, 남진(南晋) 사람도 북방 제부족 사람도 아닌 변황인이 될 뿐이었다.
변황집은 본디 전쟁과 약탈로 파괴된 항성(项城)이었다. 전쟁 없는 세월이 오래 지속되면서 사상 최대의 번화가로 자랐는데, 안타깝게도 또 다시 북방으로부터 남북 전쟁의 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 위험은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저족이 세운 진(秦)나라의 주인 부견(苻坚)은 말을 타고 사수의 남쪽 높은 언덕 위에 올라 선봉부대의 거대한 진용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방에 꽂힌 깃발은 마지막으로 남은 적인 남진을 향해 표표히 휘날리고 있었다. 첫 번째 공격은 회수 남쪽에 있는 상대의 전략 기지인 수양(壽陽)이었다. 그의 마음속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흥분으로 가득 찼다.
7년 전, 그는 병사를 이끌고 선비족 탁발씨의 대(代)나라를 무너뜨렸고, 대(大)진나라 군사의 말밥굽 아래 북방 통일이 완성되었다. 흉노, 선비, 강, 갈, 한(漢) 등 다섯 민족은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라 칭했고, 이어 진(晋)나라는 ‘영가의 화’를 당해 남쪽으로 쫓겨났다. 72년 동안 여러 부족이 권력을 다투고, 무수한 군웅이 할거하던 시대를 잠재웠으니 그 공적은 고금을 떨쳐 울릴 정도였다. 더욱이 타 부족이 중원에 들어온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이제 남정(南征)을 위한 조건은 모두 갖추어졌고, 남진의 양주와 익주 및 전략기지 양양(襄陽)은 그의 손에 떨어졌다. 천하 통일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따고 난 후에는 그 누가 있어 그와 예봉을 다툴 것인가?
이번에 남정길에 그는 아우인 부융(苻融)을 원수로 삼고, 대장 모용수(慕容垂)와 요장(姚萇)을 부장으로 삼아 보병 60만, 기병 27만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파촉(巴蜀)에서부터 장강과 한수(漢水)를 따라 8만의 수군이 동쪽으로 전진하고 있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좋았다. 실력으로 따지면, 장수와 병사가 부족한 남진의 군사들이 제아무리 항거하더라도 쉽게 박살내버릴 수 있었다.
부견은 올해 마흔다섯 살이었다. 새외의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자란 저족답게 몸집이 크고 튼튼했으며, 절대 고갈되지 않는 정력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자줏빛이었고 짧은 구레나룻은 입술 언저리까지 자라 있었다. 거기다 높은 코와 푹 들어간 눈까지 이목구비가 또렷하여 천하에 군림하는 영웅다운 기개를 풍겼다.
지금 그의 눈동자는 지평선 저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진의 군대가 그가 보낸 한족, 저족, 강족, 선비족, 갈족 연합군에게 패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서는 광채가 번뜩였다.
수많은 별들이 달을 호위하듯, 그의 전후좌우로는 십여 명의 명장들이 도열해 있었다. 북방 제 부족을 대표하는 가장 걸출한 인물들로써, 그가 ‘혼일사해’의 정책을 진행하면서 얻은 사람들이었다. 부견은 뛰어난 인물들을 모아 위대한 사업을 실현시키려 했다. 그의 앞에서는 전쟁에 패하더라도 나라가 망하고 왕족이 모조리 죽임을 당하는 처참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패자를 융숭히 대접하는 사람이었다. 나라를 멸망시킬 때마다 그 군신들에게 관작을 내렸고 옛 부족을 통솔하여 왕도의 정치를 행했다. 이런 것은 그에게 있어서 천하를 통일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모인 장수들 중 가장 이름이 있는 사람은 부견의 왼쪽에 있는 으뜸가는 장수, 선비족의 모용수였다. 그는 무공이 매우 뛰어나, ‘북패(北霸)’라 불리는 그의 창은 천하무적이라 알려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천하를 종횡하면서 한번도 져 본적이 없는 총사령관이기도 했다. 그 휘하의 선비족 전사들은 모두 용감무쌍하여 부견을 위해 수많은 공을 세워 그 이름이 사해에 떨쳐 울렸다. 그를 거둔 것은 부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모용수는 부견이 가장 두려워하는 강적이 되었을 것이다.
모용수는 부견보다 나이가 10살 어렸지만, 산처럼 거대한 몸집을 가지고 있어서 키는 부견에 비해 머리 절반 정도 컸다. 그의 얼굴은 준수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새까만 장발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강철로 된 띠를 두른 이마 아래로 깊은 눈동자가 자리했는데, 그 눈동자에서 뿜어 나오는 신광은 그 깊이를 측정할 수가 없었다. 허리를 똑바로 펴고 선 그에게서 풍기는 위압감 역시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였다. 마치 저승의 사신이 인간 세상에 나타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부견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강족의 맹장인 요장이며, 모용수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오척의 단신으로 사람들보다 한참 작았지만, 두꺼운 목이며 단단한 얼굴, 표범같이 커다란 머리, 번쩍이는 고리눈에다 현철로 만든 50근짜리 쌍단극을 들고 있는 모습을 대하면 그 누구도 감히 그를 얕볼 수가 없게 되곤 했다. 그를 얕본다면 분명히 견디기 힘든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 외의 장수들도 모습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용맹하고 늠름한 사람들이요, 전장에서 많은 파란을 겪은 인물들이었다.
부견은 시선을 거두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았다.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조롱하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 ‘안석(安石)이 나오지 않으면 창생은 어찌하련가?’라는 말이 있었소. 이제 안석이 나와 사마요(司馬曜)를 위해 군사를 이끌게 되었으니, 그가 짐의 손바닥 위에서 어떤 수를 부릴지 한 번 봐야겠구려.”
모용수의 뒤에 있던 저족 장수 여광(吕光)이 빙긋 웃으며 말을 받았다.
“사안(谢安)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그래봤자 은호(殷浩)같이 풍류를 즐기는 명사 나부랭이가 아닙니까. 학문이나 논평에 있어서야 그를 따를 자가 없지만, 싸움터에서는 검이나 닦고 있으면 딱 맞을 겁니다.”
별명이 ‘용왕(龍王)’인 여광은 수영 실력이 천하제일이었고, 무기 역시 ‘혼수자(渾水刺)’를 쓰고 있었다.
안석이란 남진의 재상인 사안의 자였다. 그는 중원제일명사로 불리었지만, 동쪽 산에 들어가 은거를 시작한 후 16년이나 출사를 거절하였다. 그래서 ‘안석이 나오지 않으면 창생은 어쩌하련가’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것만 봐도 남진 사람들이 그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걸고 있으며 얼마나 경모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은호 역시 남진에서 덕망 높은 명사로, 다섯 수레의 책을 읽을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지만 군사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제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조적(祖逖), 유량(庾亮), 유익(庾翼) 등 진나라 장수의 뒤를 이어 군사를 통솔해 북벌을 시작했다가 참패를 당했다. 덕분에 명사로 불리던 명예를 실추시켰을 뿐 아니라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여광이 사안을 은호 같은 무리라고 묶어 말한 것은 북방 호걸들이 사안 같은 유명 인사들을 깔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제장들이 분분히 일어나 그에게 동의하자 기세가 한껏 높아졌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모용수와 요장은 말없이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부견은 이상하다는 생각에 눈을 찡그리며 불쾌한 듯 물었다.
“두 분에게는 다른 생각이라도 있으시오? 짐에게 사실대로 말해 보시오.”
요장이 숙연한 얼굴로 아뢰었다.
“진나라 황실이 약하기는 하나, 장강의 험함과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군대를 끌고 남으로 내려가면 그들은 필히 여태껏 없었던 힘으로 단결하고 덤빌 테니, 신은 감히 그들을 얕볼 수가 없습니다.”
부견은 본래의 안색을 찾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남인들은 지금껏 사치에 젖어 안일하게 지내왔소. 즐기고 노느라 병기조차 수리하지 않았고, 남쪽으로 이사한 호족과 남방 토착 세력들이 끊임없이 다투고 있소. 우리 병사가 성 아래에 도착한 후에 단결을 해 봤자 이미 늦은 셈이오. 장강이 험하다고 하지만, 우리의 백만 병사가 달려가 채찍 하나만 던져도 그 흐름이 막히고 말 것이오. 남방의 어린 아이들이 무슨 수로 우리를 막는단 말이오?”
그들은 모두 한어(漢語)를 사용하고 있었다. 당시 가장 잘 쓰이던 언어가 한어인데다 각 부족에서 신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정부 용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저족의 진은 제 부족 중에서 한화가 가장 많이 진행된 국가였고, 부견 역시 자신이 한인보다 유가나 왕도에 대해 더 잘 안다고 자부했다. 해서 천하사방을 공략한 후 유일하게 왕법이 미치지 못한 곳이 동남쪽 한 구석이라 생각해 유감스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그 유감을 풀 역사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부견의 시선이 모용수에게 향했다. 무공과 병법에 있어 북방에서 제일이라는 이 대장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남인의 병력은 확실히 우리 군에 비해 떨어지지만, 사안은 뛰어난 인물입니다. 그 조카인 사현(谢玄)이 이끄는 북부병(北府兵)은 10만이 되지 않아도 결코 가볍게 보아선 안 될 것입니다. 주군께서는 부디 밝게 살펴주십시오.”
부견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말이오. 손자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고 했소. 짐도 북부병에 대해서는 이미 생각해놓았소. 이번에 우리가 군사를 휘몰아 남진의 도성 건강(建康)을 공격하면 남인들에게는 딱 두 가지 선택만이 남소. 하나는 소굴을 버리고 나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성에 남아 죽으라고 지키는 것이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들에게 요행은 없소. 짐은 오랫동안 고생하며 기다렸소. 이제는 북쪽을 정벌하여 후환을 없앴으니 국력을 쏟아 부어 압도적인 병력으로 일거에 사마요와 사안 무리를 쓸어내 꿈을 이루어야할 때요. 사현이 비록 남방 제일의 검술가이자, 상상(上上)의 고수라 하지만 군사에 관한 경험은 적소. 몇 번에 걸친 승리는 오로지 강적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오. 남조의 제장 중에 뛰어난 사람은 환충(桓沖)정도고, 그 아비인 환온(桓温)이 약간의 재능이 있을 뿐이오. 허나 그들은 짐이 형주(荆州)를 견제하자 이를 막기 위해 강릉(江陵)을 사수하고 있으니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소.”
그가 문득 큰 소리로 외쳤다.
“주경, 짐의 말이 옳지 않소?”
제장들 중 가장 뒷줄에 서 있던 한인 장수 주서(朱序)는 그 말에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황급히 대답했다.
“폐하께서는 남방의 정세를 손바닥 보듯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신은 그저 감복할 따름입니다.”
주서는 본래 남진의 장군으로, 4년 전 양양을 지키다 패하자 투항했다가 부견에게 등용된 사람이었다. 부견은 이때부터 남진의 병력이 무척 약하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벌써 4년 전의 일이었다.
부견은 무척 만족한 듯 하늘을 향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마음속 호기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경은 안심하오. 짐은 항상 왕도만을 따랐고 덕으로 사람을 다스렸소. 사해가 한 집안이 되면 결코 무고한 자를 죽이지 않을 것이오. 남쪽을 평정한 후 그곳의 인재들도 모두 등용하겠소. 사마요는 상서좌복야로, 환충은 시중으로, 사안은 이부상서로 봉해 구품관인법을 시행하도록 하겠소. 그가 짐을 위해 인재를 모아줄 것이오.”
쨍-!
부견은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막 동쪽 지평선에서 솟아오르는 태양을 가리켰다. 이어 그의 검은 남쪽으로 움직여 남진의 수도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그가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군대는 틀림없이 이긴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군대였다. 선봉 부대는 그 끝을 볼 수 없었고 후미 부대는 전방 부대를 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각양각색 병종으로 이루어진 진나라 대군은 위풍당당하게 회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건강성을 함락시키면, 중원의 한족은 최후의 근거지를 잃고 망국의 백성이 되어 침략부족의 통치를 받는 신민이 될 것이었다.
남진의 도성 건강은 장강 하류의 남쪽에 자리한 성으로, 바다로 향하는 입구를 틀어막는 형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는 장강 하류 지역의 군사, 정치, 경제의 중심으로, 강과 육지, 바다의 교통을 잇는 요충지였고 남북의 물과 육지 간 운송을 책임지는 도시이기도 했다.
건강은 계롱산(鷄籠山)과 복주산(覆舟山) 한 쪽 구릉의 높은 곳에 있었다. 동남쪽 평탄한 곳은 태호(太湖)의 평원 및 전단강(錢塘江) 유역과 맞대어 있는 옥야천리의 땅이었다. 장강은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성을 돌아 흐르고, 진회하(秦淮河)는 굽이쳐 성 남쪽 밖 장강과 합쳐진다. 그 형세가 마치 범이 버티고 선 듯 험하기 그지없었다. 요장이 ‘장강의 험함과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보유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은 확실히 거짓이 아니었다.
서진이 흉노에게 멸망하고 낙양이 초토화될 때, 진나라 개국 황제인 사마의(司馬懿)의 증손 사마예(司馬睿)는 삼국시대 손권이 세운 도성 건업(建业)을 지키며 양주와 강남의 군권을 쥐고 있었다. 북방이 무너지자 사마예는 남쪽으로 옮겨온 호족인 왕도(王導), 왕돈(王敦) 등의 지지를 받아 건업에서 진왕으로 즉위했고 이어 황제를 칭하였다. 이어 민제(愍帝)에 이르자 정식으로 건업의 명칭을 건강으로 바꾸었다.
건강성 밖 20리 19보 거리에는 동부성(東府城)과 석두성(石頭城), 단양군성(丹陽郡城)등이 둘러싸듯 자리하여 별이 달을 호위하는 듯 강대한 형세를 띠고 있었다. 도성인 건강성을 중심으로 핵심 도시가 조직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성 서쪽 상류의 석두성에는 강한 군대가 머물면서 건강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었다. 석두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면 건강에는 손끝하나 댈 수 없었다.
부견의 대 진나라 군사가 회수와 사수 사이에 있는 변황 지역으로 들어가자, 남쪽 전략기지인 수양을 지키고 있던 진나라 장군 호빈(胡彬)은 변황집에 숨어 들어가 전선 상황을 파악하던 세작이 보낸 비합전서를 받고 대진의 백만군사가 회수를 지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변황집이 천하의 소식에 가장 빠른 지방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남북 정권에 어떤 이상한 흐름이 발견되면 사실이든 헛소문이든 일단 이 곳을 먼저 거쳐야 했다. 해서 변황집에는 전문적으로 소식을 사고파는 ‘풍매(風媒)’라는 직업도 생겨났다. 이런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각 부족의 언어에 정통해야 하고 인맥이 넓어야 했다. 또한 사람들에게 속지 않기 위해 소식의 진가(眞假)를 가릴 수 있는 분석력도 갖출 필요가 있었다.
호빈은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그 사실 여부를 몇 번이고 확인한 후, 즉시 건강성으로 비보를 날렸다. 진나라 황실의 생사존망이 걸린 소식이었다. 진나라 황제 사마요는 이 소식에 혼이 빠져나갈 정도로 놀랐다. 그러나 혹시라도 소식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대공황에 빠진 신민들이 달아나지 않을까 두려워 은밀히 사안과 왕탄지(王坦之), 사마도자(司马道子) 등 세 사람의 중신을 불러들였다. 그들이 도착하자 사마요는 건강성 궁 안에 있는 집무실로 그들을 데리고 가 나라를 보존할 계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사안은 진나라의 중서령으로 황제 사마요 다음가는 지위에 있는 인물이었다. 조정을 총괄하고 있는 그의 나이는 올해 예순 넷이었다. 젊었을 적 잠시 출사했다가 물러나 산에 은거했는데, 마흔 살이 되어서야 끈질긴 부름을 이기지 못해 다시 정치에 나서게 되었고, 개국 승상인 왕도의 ‘고요함으로써 다스린다’는 정책을 이어받아 남진을 평안히 다스렸다. 그는 대장군 환충과 함께 문(文)과 무(武)로써 남진 조정을 떠받치고 있었기 때문에 ‘강 왼쪽의 위대한 인물’이라 불리었다.
당시 남진의 통치 지역은 장강 중하류와 민강(岷江), 주강(珠江) 유역 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 중에서 형주와 양주가 정치와 군사 방면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양주는 수도 건강성 북쪽에 있으니 그 중요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 형주는 장강 중류에 있으며 지형이 험난하여 남진 서부군의 중요 전략기지였다. 동시에 양호(兩湖)일대를 관장하며, 그 자사는 종종 근처 주(州)의 군사까지 맡아 북방의 오랑캐에 대비하였기 때문에 지역이 넓고 병사가 강력했다. 형주 자사를 맡으면 가장 실력이 강한 진용을 얻게 되는 것이다. 해서 남진에서 중앙과 지방 세력이 격렬하게 싸운 경우는 대부분 형주와 양주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전대에 형주를 다스린 환온은 야심 컸지만, 다행히 새로 부임한 환충은 환온의 아들이면서도 아버지만한 야심이 없어 형양 두 지역이 무사할 수 있었다. 부견이 거론한 세 사람 중 황제와 사안을 제외한 남은 한 사람이 환충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당대 제일 명사라 불리는 풍류 재상 사안은 이미 노년이었지만 여전히 정기가 넘쳤다. 깃털 부채를 흔드는 모습은 마치 제갈무후가 다시 살아온 듯 했다. 그는 훤칠한 체구에 수염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 멋스럽고 유유자적하면서도 도도해보였다.
왕탄지는 개국 승상 왕도의 아들로 현재 좌승상을 맡고 있었다. 그는 건강 조정에서 사안을 제외하면 가장 실력 있는 대신이며 올해 나이 쉰두 살이었다. 생김새만 보면, 작달막한 키에 몸집이 통통하고 머리는 거의 백발이었으니 사안보다 훨씬 떨어지지만, 다행스럽게도 보기 좋은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턱 아래에 살이 많지만 터질 정도는 아니었고, 호족 가문 출신다운 자신감과 상냥함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미워 보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왕탄지와 사안 두 사람은 강 왼쪽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호족들이었다. 진나라 황실이 남쪽으로 천도한 후 두 가문이 진 황실을 지지했고, 이렇게 하여 조정의 요직을 두 가문에서 나누게 되었다. 남진은 ‘세족 중에서 현자를 구하고, 귀족에게는 법을 집행하지 않는다’는 귀족적 정책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두 가문과는 물과 고기의 관계처럼 딱 맞았다. 끼리끼리 논다고, 두 가문 역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사돈까지 맺어 사이가 좋아 나란히 황제를 보좌했다.
사마도자는 진나라 황제 사마요의 친아우로, 황족에서 가장 뛰어난 인재로 공인받은 인물이었다. 구품관인법으로 따지면 상상의 인물로, 현재는 녹상서육조사를 맡아, 조정 각 부문의 정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이 직권은 사안을 견제하기에 충분할 만큼 컸기 때문에 진나라 황실에서 사안을 감시하기 위해 그에게 내린 것이었다. 고로 그는 사안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마도자는 올해로 서른여덟 살이며 키가 크고 호리호리했다. 콧날이 곧고 입술 위로 짙은 수염을 길렀으며, 균형 있는 몸에는 무사복을 걸치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왕족다운 고귀한 기개가 가득 풍겼다. 때때로 날카롭게 변하는 두 눈동자만이 그의 마음속에 자리한 냉혹무정한 본질을 나타내 보일 뿐이었다. 그가 차고 있는 장검은 ‘망언(忘言)’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왕족의 무기 중에서 가장 날카롭고도 가장 무서운 무기였으며, 건강성 내에서는 사현과 왕탄지의 아들 왕국보(王国宝)를 제외하면 절대무적이었다.
집무실은 진나라 황제 사마요가 내정을 처리할 때 쓰던 곳이었다. 개국 이래 가장 중요한 군사회의는 벌써 2시진 동안 이어지고 있었다. 사안의 아우 사석(謝石)은 정오부터 황혼녘까지 궁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사안이 밖으로 나왔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유유자적한 모습이었지만, 그를 잘 알고 있는 사석은 형의 두 눈동자에 광채가 사라지고 정력도 소진되었음을 눈치 챘다. 이런 형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그인지라 이번 회의가 얼마나 무겁고 격렬했는지 느낄 수 있었다.
사석이 앞으로 걸어가자 사안은 똑바로 선 채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가서 사현을 불러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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