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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고서랑은...

    예스러운 배경의 소설과 드라마를 이야기합니다.

미디어/영화와 드라마

구주표묘록 감상

by 와룡 2019. 9. 18.

방영 때부터 탈이 많았던 <구주표묘록>을 드디어 다 봤다. 다 보고 났더니 마침 국내에도 곧 방영이란다.
중국의 <왕좌의 게임>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원작 자체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연출은 확실히 드라마 <왕좌의 게임>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드라마 자체는 용두사미의 전형이다. <청설루>도 결말이 좀 그렇다 했지만 여기에 비하면 아주 양호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윤 황제가 쓰러지고 상양관 싸움이 끝나는 부분까지는 정말 긴장감 넘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수작이라고 해야겠다. (여기까지 힘써준 만큼만 더 힘써줄 것이지... 근데 원작도 그렇다는 말이...) 게다가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모의 여인들. 소 상궁은 말할 것도 없고 백주월에 궁우의도 우아하기 짝이 없는 데다 악인인 장공주까지 미모를 자랑한다.

구주표묘록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세계 구주는 중국 판타지 작가 일곱 명이 함께 만들었다. 200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니 오래된 셈이다. 구주표묘록은 그중 한 명인 작가 강남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각색한 드라마다.

바이두에 따르면, 고대 왕조 때만 해도 하나의 땅에 아홉 개의 주가 있었는데, 지진과 대홍수로 인해 땅이 갈라져 세 개의 대륙이 되었다고 한다. 이 대륙을 각각 동대륙, 북대륙, 서대륙으로 부른다.
각 대륙과 그에 속한 주는 다음과 같다.

  • 동대륙(중심지): 중주, 란주, 완주, 월주
  • 북대륙: 상주, 한주, 녕주, 상주
  • 서대륙: 운주, 뇌주

구주 지도 (출처: 바이두 백과)

북대륙 세 개 주는 각기 다른 종족이 차지하고 있다. 가장 멀리 떨어진 상주에는 과부족(거인족)이, 초원 위주의 한주에는 유목민족이, 숲 위주의 녕주에는 우족(날개 달린 인간)이 산다. 동대륙에는 구주의 황실이 있고, 농경민족인 화족(일반적인 인간), 철을 잘 다루는 하락족(드워프 같은데 차림새는 중동), 마법(?)에 능한 매령족이 함께 산다. (서대륙은 왜 정보가 없지?) 세 대륙 사이의 내해에는 인어족도 사니 도합 7 종족이다.

드라마 <구주표묘록>에는 이 중 유목민족과 우족, 화족, 하락족이 등장한다. 주인공 세 사람은 각기 유목민족, 우족, 화족이다. 배경은 네 번째 왕조인 윤(胤)나라(보통 대윤으로 자칭) 말기이며, 주인공들이 자주 이야기하는 장미황제가 바로 이 대윤나라를 연 사람이다.

한주 초원의 모습

대윤은 또 무엇

화족의 황금기를 이룬 대윤은 장미황제가 개국한 이래 600년의 역사를 가진 왕조로, <구주표묘록>외에 이 곳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 네 개 더 있다. 
황실 성씨인 백씨가 아닌 자는 왕으로 봉하지 않는다는 설정이므로, 각 나라 주인들이 높아야 공작이다. 황실인 백씨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크게 번창했으나 황실과 가장 가까운 쪽은 제후국인 초위국 국주 백씨다. 용장(龍將) 백의도 황실의 한 갈래이고.

드라마 기준으로 주요 제후국을 간단히 살펴보면 이렇다.

  • 하당국(下唐国)

    황실을 제외하고 가장 큰 집안인 백리씨 집안이 봉해진 나라. 백리씨는 황실에 남아 황제를 보필하는 집안과 상당국 제후 집안, 하당국 제후 집안으로 나뉜다. <구주표묘록>의 국공 백리경홍은 하당국 백리 씨이고, 장공주 곁에 있는 백리영경은 황실 보필 쪽 백리 씨다. 상업이 발달하고 물자가 풍부한 지역에 있어 부유하지만, 군사력이 약한 편이다.

풍요로운 하당국 풍경. 아래 사진은 하락 상인들도 있는 귀시

  • 리국(离国)

    남쪽 월주에 자리한 후국으로, 하락인들의 침략에 맞서는 번국같은 역할을 한다. 낙후된 곳이지만 사납고 거친 자들이 많은 데다 <구주표묘록> 때인 영무예가 주인이 되면서 기병 뇌기와 보병 적려를 길러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낙후된 리국

  • 초위국(楚卫国)

    제국 수도 천계성의 관문 역할을 하는 황실 성씨인 백씨 집안의 왕국. 하당국, 리국 사이에 있고, 북쪽으로 상양관에 접한 요충지다. 농경과 상업이 발달한 부유한 곳이며, 중갑창병과 기병의 돌파를 저지하는 산진으로 유명하다. 이 모두 <구주표묘록>에 나온다.

천구와 진월

구주의 기나긴 역사 속에 다양한 신비 조직이 있지만 <구주표묘록>에는 천구와 진월이 등장한다.
천구무사단은 평화를 수호한다는 기치 아래 모여든 무사들로, 구주에서 가장 오래 유지된 조직이라고 한다. 대종주 휘하 여섯 종주로 이루어지며, 대종주가 가진 '창운고치검'은 오래전 어느 대종주가 하락인을 구해주고 얻은 검으로 무기고의 열쇠라는 전설이 있다. 대표 동물은 매이고, '철갑의연재 - 철갑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구호를 쓴다.

천구무사단 구호와 반지. 저렇게 손을 모았다가 손바닥을 붙이고 두 손을 사선으로 접어서 인사한다

진월은 마법과 환상 같은 비술에 능한 조직으로, 좀비를 길러 군사력이 상당하다. (좀비가 구주 세계관인지 표묘록 설정인진 모르겠다) 별과 달을 숭배하며 그 예언을 따른다고 하는 종교로, 가장 신비로우나 그 파급력 때문에 권력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매번 배반한 역사가 있다고. 대표 동물은 까마귀다.

진월의 뇌벽성. 어두워서 잘 안보이지만 곁에 좀비들이 있다.

<구주표묘록>에 따르면, 오래전 나라에 기근이 들자 황제가 두 서생을 불러 자문을 했는데, 그중 한 명은 사람을 죽여 인구를 줄여 식량을 나누자고 했고 (타노스?) 다른 한 명은 말없이 있다가 나가서 온갖 방법으로 식량을 구해 사람들에게 베풀었다고 한다. 사람을 죽이는 쪽 서생을 따른 이들은 식량은 차지했지만 점차 미치광이가 되어갔고, 식량을 배급한 서생은 처음에는 비웃음 당하고 강도당하기도 했으나 점차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다. 명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미치광이 쪽이 진월, 식량 배급 쪽이 천구일 것이다.

이 두 조직의 오랜 싸움이 <구주표묘록>의 커다란 이야기 줄기를 이룬다. <구주표묘록>에서 천구는 평화를 수호하지만 권략자에 배척당해 세력이 약해졌고, 진월은 혼란을 추종하지만 그 힘때문에 권력자들의 지지를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워낙 방대한 세계관이라 어차피 다 가져와서 설명할 순 없고, 드라마에 나오는 것까지만 정리해보았다. 짧게 쓰려고 했는데 이렇게 길어지다니... 이제 진짜 <구주표묘록> 이야기를 해보자.

스포 주의!

<구주표묘록>의 주인공은 한주 초원의 지배자인 청양부의 세자 아소륵 파소이(북방민족식으로 읽자면 아술어 파수르, 화족 이름으로 여귀진)이지만, 그의 친구인 우족의 우연과 화족 희야의 비중이 비슷하므로 세 주인공이라고 하자.

세 주인공, 왼쪽부터 희야, 우연, 아소륵 (출처: 바이두 백과)

주인공 이야기

일단 서사만 보면, 희야가 좀 더 진주인공 같긴 하다. (이름이 희야라서 웃기지만) 명장 희양의 증손자지만, 서출인 데다 아버지가 천구무사단이란 이유로 위험해지자 그와 어머니를 놔두고 달아났기 때문에 어린 시절에 눈앞에서 어머니가 고문당해 죽는 것을 봐야 했다. 아버지와 재회한 후에도 본부인의 차별, 적자인 동생의 무시에다, 아버지마저 자신을 동생의 그림자로만 만들려 해서 항상 '나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싶다(내 이름은 희야! 황야의 야!)'는 마음을 품고 있다가 난세를 만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미래를 점쳐준다는 신상 앞에서 동전을 던지며, 일개 '부장'이 될 수 있는지, '교위'가 될 수 있는지, '도호'가 될 수 있는지 물었지만 모두 뒷면이 나와 실패했다. 하지만 마지막에 화가 나서 희씨 집안의 일인자요, 장군이 되겠다는 말과 함께 던진 수많은 동전은 모두 다 앞면이 나왔을 때 나도 같이 감동했다.

비무에 나가기 전에 다시 미래를 점치는 희야

첫 등장은 가엾은 서자이자 길거리 건달 패거리의 하수인이었지만, 차차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주인공 세 사람이 어려움을 만날 때면 대부분 희야가 구해준다(희야가 없었으면 주인공 세 명은 몇 번은 죽고도 남았다). 아소륵처럼 비까 번쩍하게 타고난 혈통이라든지 점지된 대종주라든지 하는 건 없지만 실력으로 대종주 자리를 차지하고 나중에는... 무너진 대윤을 이어 새 나라(대섭)를 연다. 드라마에 이 내용까지 나오지는 않지만, 하락 상인의 집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소라를 구경할 때 살짝 보여준다. 이때 희야는 높은 성곽에 꽂힌 깃발 아래 홀로 선 사람을 본다. 아소륵은 과거를, 우연은 현재를 봤으니 그가 본 것은 미래이고, 마침 그 깃발에 그가 세우는 나라 이름 '섭(燮)'자가 수 놓여있다.

과거,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소라를 들여다 보는 세 주인공
아소륵의 과거
우연의 현재
희야의 미래. 깃발에 '섭'자가 있다

그럼, 아소륵은 왜 주인공인가?
아소륵은 <구주표묘록> 이야기의 큰 줄기인 평화와 동란의 싸움에서 가장 큰 역할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청동의 피를 이어받은 광전사로, 가차 없이 사람을 죽이고 스스로도 미치는 운명을 타고났으니 진월과 똑같은 길을 걸어야 할 사람이었다. 진월이 끝끝내 그를 끌어들이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대합살의 말처럼, 워낙 타고난 천성이 선량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피를 이겨낼 수 있는 희망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진월을 무너뜨리고 천구가 바라는 평화를 가져다줄 사람이기에, 그는 <구주표묘록>의 주인공일 수밖에 없다. 

변신한 아소륵. 

희야와 달리 그는 전형적인 주인공이다. 초원 왕의 귀한 막내아들이자 삭북 랑왕의 외손자, 게다가 전설의 무인이 될 수 있는 청동의 혈통. (+얼굴까지 잘생겼다. 누가 봐도 거친 북방 유목 민족 얼굴이 아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악마라는 예언을 받았고, 태어날 때 죽었으나 어머니가 비통함에 자결하는 순간 되살아나는 등 불길한 면이 있었기 때문에 어려서 진안부에 보내졌다. 하지만 진안부와 청양부의 싸움에서 진안부가 무너지면서 다시 청양부로 돌아온다. 말자 상속 원칙에 따라 세자가 되지만 이미 성인이 된 형님 넷이 호시탐탐 자리를 노리고 있는 데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동대륙 하당국과의 식량-군사 원조 혼인 협정에서 동대륙 사자로 온 탁발 장군의 눈에 띄어 혼인 대상자로 낙점된다. 어차피 청동의 피를 이기지 못해 요절할 수 있는 몸이었기에 쉽게 받아들였지만, 운명적으로 연결된 진월의 뇌벽성이 찾아와 그의 목숨을 연장시켜준다. 아버지인 청양 대군은 좀 더 발전한 동대륙에서 신의를 찾아 병을 치료하기를 바라며, 더불어 차라리 평화롭게 살기를 바라며 그를 보내준다.

생각해보면 진월은 이미 여기서부터 모든 계획이 서 있었나 보다. 좀비 군단인 적아(赤牙)가 하당으로 가는 아소륵의 일행을 기습해서 진양부의 딸이자 아소륵의 첫사랑(사실은 둘째 사랑?)인 소마를 죽였으니까. 실제로는 죽인 척하고 데려가서 초원의 동란을 일으킬 불씨로 키웠지만, 난 첫사랑 역할인 소마가 너무 빨리 죽어서 혹시 나중에 똑같이 생긴 여자가 나타나려나 했었다. 그런데 살아있을 줄이야...
동대륙으로 건너간 아소륵은 그곳의 병법, 문화를 배우고(라는 설정이나 막상 그런 내용은 잘 안 나옴) 생사지교인 우연과 희야를 만난다.

처음에는 전형적인 영웅 주인공의 전형적인 영웅 이야기인 줄 알았다. 아소륵이 청동의 피를 이겨내고 저 힘을 이용해 전무후무한 무사가 되어 난세에 종지부를 찍은 뒤 초원의 왕, 나아가 구주의 왕이 되려나보다. 그리고 장군이 될 거라는 신의 계시를 받은 희야는 그 오른팔이 되어 통일에 도움을 주나 보다... 했는데.

충격적이게도 거의 40편까지 주인공 세 사람이 이룬 게 하나도 없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드라마가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깨뜨렸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주인공 세 사람은 결국 구주라는 커다란 세상의 권력 싸움에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우리네와 같은 사람일 뿐이며, 그들을 통해 저 잔혹한 권력의 세상을 보여주려나 했다.
천구무사단 사건으로 희야가 붙잡히고 이리저리 두들겨 맞을 때, 도대체 우연은 왜 빨리 날개를 안 펴냐며, 우족이라는 설정은 언제 써먹으려고 이러느냐고 소리소리 질렀는데도 끝내 날개는 없었다(오히려 철황이 황제를 구할 때 우족 설정이 실력을 발휘한다). 청동의 피는 언제 발현되냐고 빨리 구하라고 발을 동동 굴렀는데도 끝내 청동의 피는 희야를 구하지 못했다. 둘 다 대단한 피를 가지고 있음에도 아소륵과 우연은 제힘으로 친구를 구할 수 없어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서로 혼인함으로써 희야의 목숨만 겨우 살렸다. 그게 주인공들이다. 정말이지 치이고 또 치인다.

그런 마음을 먹고 보기 시작하니, 정말이지 황제국과 각 제후국의 정치 싸움이 참 처절하고 현실적이었다. 주인공들의 이야기만 이상적인 판타지 같아서 붕 뜬 것 같고, 그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현실적이다.

주인공보다 눈에 띄는 주변 인물들

제후들

하당의 국주 백리경홍은 우족이 무너진 뒤 찾아온 우족의 궁우의와 혼인하고 양쪽의 이익을 도모한지 십수년 째. 군사력이라는 하당국의 약점을 보충하고자 한겨울 식량난을 겪는 청양부에 식량을 제공하는 대신 군사를 빌린다. 또 오래전 반역자로 황실의 쫓김을 당해 하당국에 왔던 천구무사단 대종주의 아들을 받아주었고, 그 아들을 이용해 천구무사단까지 손에 넣어 최종 권력자가 되기를 꿈꾸고 있다.

군사력은 약하다면서 어찌된 셈인지 동대륙 4대 명장 중 두 사람을 수하에 두고 있다. 한 사람은 호장(狐將) 식연, 다른 한 사람은 호장(虎將) 탁발산월이다. 따지고보면 식연은 소 상궁에게 반해서 따라온 사람이니 백리경홍의 계획 중 하나일 수도 있다. 황실 쪽으로는 수렴청정 중인 장공주 백릉파 쪽에 서 있다. 궁우의와는 이익으로 뭉친 사이 같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고, 궁우의가 죽자 그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지능이 떨어지는 아들은 궁우의 소생인지, 전 부인 소생인지 알 수 없다) 도성에 들어가 방백이 되면서 목표를 이루나 했는데 너무 허무하게 죽어서, 궁우의의 죽음으로 충격이 컸다고 해석하는 쪽이 마음 편할 듯하다.

하당국주 백리경홍 (출처: 바이두 백과)

리국후(천계성에 들어간 후 '공'으로 작위가 오름) 영무예는 제후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세상 꺼릴 것 없는 사람이다. 이미 엄청난 군사력을 보유한 데다 진월과 손잡아 뇌벽성을 국사로 삼은 상태. 물론 뇌벽성은 늘 주인을 배신하므로, 결국엔 그를 배신하고 그 아들을 죽이지만. 아무튼, 그는 젊은 시절 천계성에서 백의와 식연을 만났을 때도 영웅으로 알아보았고, 하당국과 리국의 전투에서 만난 아소륵과 희야도 가상하다며 좀 더 커서 찾아오라고 놔준다. 초반부의 악인 같지만, 사실은 난세의 효웅이고 딱 조조의 상이다. (어쩐지 조조 같다 했는데 정말 이 배우가 조조 역을 한 적이 있다.) 꿍꿍이 많은 백리경홍에 비하면 시원시원한 악당이라 할 수 있다.

무력을 이용해 무식하게 말을 타고 황제의 대전에 쳐들어가, 수렴청정하던 장공주까지 물리치고 황제를 조종하는 패자가 되었지만 황제가 천구무사단을 이용해 반격하고 군비가 떨어지자 별 수 없이 리국으로 철수한다. 그리고 <구주표묘록> 드라마 전체에서 가장 압권인 상양관 전투를 치른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리국으로 돌아간다. 그의 이상은, "황제가 없는 나라"다. 그간 리국이 많은 희생을 치르며 나라의 번국 노릇을 했으나 얻은 게 없다며, 오로지 리국을 위한 나라를 만들고자 도성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원작에 따르면 훗날 오갈 데 없는 희야와 여귀진을 받아준 뒤 희야와 딸 영옥을 혼인시킴으로서 권력의 최상위로 오를 길을 마련하긴 했다. (물론 희야가 가만 안두지만)

리국공 영무예 (출처: 바이두 백과)
고비구 전투에서 아소륵, 희야와 마주치는 영무예

무사들

식연은 정말 이야기가 많은 사람이다. 주인공 삼아 소설을 써도 될 정도. 젊은 시절에는 백의와 함께 도성 천계성에서 세상을 바꿔보겠다던 금오위 소속 무사였다. 백의 말고 한 사람이 더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잘 그려지지 않았지만 초반부 영무예의 도전에 황실측에서 내세운 옛 천구무사단 무사로 나왔다가 후반부 황실 반정에서 금오위 대장으로 다시 나온다. 아마 세 사람이 단짝이지 않았을까?

천구무사단이 대종주의 반역(실제로는 모함)으로 역모군으로 몰리자, 식연 역시 도성을 빠져나가 남하했고, 달아나는 중에 만난 암살자 소 상궁과의 인연으로 신분을 숨기고 하당국의 장수가 된다. 천계성에 있을 때 술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어렵게 지내왔는데 술집 주인이 나와서 쫓아내자 "반드시 이 술집을 사버리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다고 하며, 실제로 정말 그렇게 해서 훗날 천구무사단의 비밀 장소로 만든다.
소 상궁과의 로맨스는 또 어찌나 절절한지. 철황에게 소 상궁을 살려달라며 지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며, 소 상궁에게 한 번만 돌아봐 달라고 하는 장면 등등에서 지고지순한 순정남을 잘 보여준다. 보통 이런 순정남은 여자가 죽은 후 무너지기 마련인데, 그는 무너지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천구무사단을 지킨다.
몇 달 전 앱에서 추천받아 구매한 무협 소설이 중국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진다고 들었는데, <구주표묘록>에서 식연을 연기한 이광결이 주연이라고 한다. 이미지도 좋고 연기도 좋아서 기대 중이다.

호장 식연 (출처: 바이두 백과)

철황은 초반부터 후반까지 등장하는 주요 인물로, 초반에 너무 멋있게 나와서 후반의 캐릭터 붕괴에 충격이 컸다.
철황은 천구무사단의 종주 중 한명이지만, 대종주가 누명을 써서 쫓길 때 황실과 화해하자는 목적으로 대종주를 죽이는 일을 주도했다. 첫번째 배신이다. 여귀진이 창운고치검을 뽑아 대종주가 된 후 엄청나게 떠받드는 듯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스스로 천구무사단 리더 노릇을 했고, 천구무사단을 복권하기 위해 황제와 손잡고 여귀진을 죽이도록 눈감아 준다. 두 번째 배신이다.
생각해보면, 자신과 인연이 닿았다며 진월이 보낸 적아에 당할 뻔한 여귀진을 살려주고, 혼내러 찾아간 희씨 집안을 용서하고, 희야에게 조상의 창술을 알려주고, 식연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을 죽이려고 한 소 상궁을 놓아주는 등 초반에 그의 행보는 실로 주인공들의 스승이 될 영웅이었다. 
알고보니 그가 두 번 배신까지 해가며 천구무사단을 복권하려 했던 이유는, 그 힘으로 우족의 고향인 녕주에 가서 우황을 죽였다는 누명을 풀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배신까진 신념의 차이니까 이해해줬지만, 그 후 어려움에 처한 세 주인공을 보살펴주러 온 줄 알았더니, 우연이 우족 공주이자 희무신이라는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 뒤 아소륵을 죽이고 그녀를 납치하는 이상한 계략을 세우고 떠났고 결국 녕주 땅에서 처절하게 당하고 죽음을 맞는 것을 보게 될 줄이야. 따지고보면 그의 마음속에 가장 중요했던 것은 고향과 종족이었던 셈인데,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철황의 기술. 창술과 날개! 날개 한쪽이 망가져있다.

초반에는 희야와 철황에게 반했는데, 중반부부터 내 관심사는 오직 백의였다.

백의는 동대륙 사대 명장(용장 백의(초위국), 호장 탁발산월(하당국), 표장 화엽(순국), 호장 식연(하당국)) 중 수장인 용장으로, 젊을 때는 황실 금오위에 속했고, 어전월장군이자 무양후로 봉해졌다. <구주표묘록> 드라마 시점에서는 초위국의 대장군이다.

초위국 국주는 황제의 동생인 백주월의 친어머니로, 젊은 시절 천계성에 갔다가 아비를 모르는 아이를 가졌고, 그 아이를 선제에게 입양시킨 뒤 초위국으로 떠났다. 알고 보니 그때 만나 정을 나눈 사람이 바로 백의이고, 그 일 이후 백의는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천구무사단의 사명도 버린 채 초위국으로 갔다고 한다. 두 사람이 왜 못 맺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둘 다 황실 성씨인 백 씨이므로 그 딸 역시 황실 핏줄인 데다 선황의 양녀고, 황제가 황위를 물려주겠다는 밀조를 써준 덕에 훗날 정정당당하게 황위를 잇는다. (응? 그럼 왜 희야가 무너뜨리지?)
백의의 딸 백주월은 영무예, 장공주, 황제 세 사람의 권력 싸움에서 믿었던 오빠의 본모습을 알게 되고, 그 오빠 손에 사랑하는 아소륵이 죽는 잔혹한 경험을 한 뒤 황제 사후 다시 권력을 노리는 장공주를 피해 아소륵과 함께 달아나다가 리국에 붙잡혀 전쟁이 벌어지는 상양관 감옥에 갇힌다. 백의는 딸이 그곳에 있는 줄 모른 채, 상양관에 웅크린 영무예를 무너뜨리고 도성으로 가기 위해 연합군을 이끌고 싸웠다. 이 싸움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 제갈량 젊은 시절 같아서(게다가 '용'장이란다) 여기서부터 반했다. 나중에 딸을 도와 도성으로 가서 장공주를 물리치지만, 안타깝게도 그 과정에서 백리영경과의 거래로 인해 백주월이 백리경홍의 아들, 지능이 약간 떨어지는 하당국 세자와 혼인하게 되자 무척 안타까워 한다. 하지만 그게 끝이기 때문에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상양관 전투에 나선 백의. 전략은 비밀이지만 일단 내가 시킨대로 해라. 후작 작위를 걸겠다!
전투 바로 전날, 백의와 식연

상양관 전투는 정말 이 드라마의 압권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까지는 보는 걸 추천한다. 상양관 전투는 영무예 vs 제후연합군, 제후연합군 vs 진월로 두 번 치러지므로 끝날 때까지 보기 바란다.

상양관 전투씬. 마지막 사진은 어둡지만, 영무예의 기병을 포위한 초위국 중갑창병의 산진이다.

문제는 그 뒤다. 상양관 전투가 끝난 뒤, 이야기가 우족(철황과 우연, 궁우의 이야기) 사건, 황실과 하당국의 권력 전환 사건, 한주 청양부와 랑전단의 싸움 등으로 급격히 분산되면서 설명이 부족해지고 인과관계가 대충 뭉뚱그려져 긴장감이 확 떨어진다. 청양부와 우족 이야기는 빼고 동대륙 권력 싸움에 좀 더 집중했으면 좋았겠다 싶지만, 청양부가 주인공 이야기다 보니 빼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제대로 이야기를 해줘야 하는데, 갑작스러운 소마의 재등장부터 시작해서, 아무도 베지 못한다는 철부도 천 명과 이만 기병대를 뇌벽성 혼자 마법을 써서 다 무너뜨리는 것도 어이없고, 그래도 외할아버지인데 할아버지는 지킬지언정 외할아버지는 죽이려고 하는 주인공의 행동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마지막에 갑자기 랑야방 예왕 같은 옷을 입고 등장한 희야는 또 뭔가. 언제 저런 군대를 키웠고, 또 아소륵이 그날 마지막으로 싸운다는 것은 어떻게 알고 왔는지! 중후반까지 아무것도 못 이루고 운명에 휩쓸리기만 했던 주인공들이 갑자기 영웅 행세를 하는 것도 흐름이 영 어색하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기분은 원작을 본 사람도 마찬가지인지, 끝이 이게 뭐냐는 리뷰를 남긴 독자가 종종 보이더라. 즉, 원작도 이렇다는 충격적인 사실. 하지만 인과관계에 설명은 좀 더 있겠지.

황제가 되는 백주월

그리고, 보는 사람인 나에게야 천구무사단은 철황, 식연, 백의의 서사로 이미 감동의 도가니지만, 아소륵이 그토록 빠질 이유는 없는데도 마지막 대사가 '철갑은 여전히 존재한다'라는 구호라니. 이야기 흐름 상 아소륵이 진월이 아니라 천구무사단의 편이 되는 것이 진월을 진정으로 이기고 운명을 바꾸는 길이긴 하지만, 드라마의 서사를 봤을 때 아소륵이 천구무사단에 경도될 이유가 정말 너무 너무 없다. 검 뽑고 대종주가 된 후 한 일도 없을 뿐더러 (희야를 구하겠다거나 제 목숨을 내놓겠다는 이상주의를 부르짖다 오히려 천구무사단을 희생시키기까지 하고), 희야와의 관계는 두터울지언정 식연의 조카인 식원과의 관계는 제대로 그려지지도 않았다. 또, 천구무사단을 대표하는 철황이 그를 배신하면서 천구무사단의 의리와 평화주의를 경험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왜 최후를 앞두고 그 구호를 부르짖을까? 내 생각에는 그 흐름을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것 같다.

너무 길게 써서 여기서 접어야겠다.
<왕좌의 게임>과 비슷한 부분이라면, 주인공이 배신당해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과 좀비 군단, 그리고 허술한 뒷마무리 정도가 아닐까?

그렇지만, 어마어마한 영상미(한주의 초원, 월주의 사막, 완주의 아름다운 성시 모습, 상양관 등)에 전투씬, 배우들의 열연, 살아있는 캐릭터들을 볼 때 분명히 수작은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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