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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맛보기

당나라 퇴마사, 물리쳐야 할 '마'는 무엇인가

by 와룡 2020. 8. 14.

 

 

참 오랜만에 작업한 역사 기반 소설 <당나라 퇴마사>의 출간일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감명 깊게 본 책이기에 출간을 앞두고 소개글을 써보기로 했다.

작가 왕칭촨은 2000년대 활동한 중국 신무협 작가로, 봉가, 소단, 시미한과 함께 '무협사걸'로 불린다고 한다. 이중 봉가는 <곤륜>이란 작품으로 우리나라 무협 팬들에게도 호평을 받은 유명 작가다. 시미한 역시 2000년 초에 봉가와 함께 <금고전기 무협판>에서 활동했던 작가이며, 예전에 포스팅한 드라마 <청설루>의 원작 소설 작가 창월, 최근 방영한 드라마 <천무기>의 원작 소설 작가 보비연도 다 그때 인기 작가들이다. 당시 대원씨아이 무협 브랜드 아키타입 덕분으로 그들의 작품을 열심히 조사했었는데,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서 그 이름들이 하나둘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면 감개무량하다.

각설하고, 왕칭촨은 당시 내가 조사한 작가 중에는 없었다. 게다가 나는 이 작품을 전혀 '무협'이라고 보지 않았기에 애초에 무협 작가인 줄도 몰랐다. 무술이라는 소재 자체가 중국 고유의 문화다 보니, 고대 배경 중국 장르 소설은 기본적으로 무협적인 색채를 띤다. 나처럼, '강호 협객'을 다룬 이른바 '정통 무협'을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처럼 정치 미스터리 요소가 훨씬 강한 작품은 '무협 소설'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무협 소설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랑야방이나 풍기장림도 일각에서는 무협으로 받아들일 정도니까)

내 입장에서 이 소설의 주제와 장르를 소개하라고 한다면, 혼란한 정치 상황에서 도술과 지략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주인공의 정치추리물이다. 물론 스토리의 많은 부분에서 도술 및 무술 대결, 미스터리가 나오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당나라 퇴마사>라는 제목처럼 당나라에서 '마'를 퇴치하는 것이다. 그 '마'가 무엇인지는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나는 중국 역사에 흥미가 많다. 특히 초기 당나라는, 중국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는 유명하고 재미난 이야기가 많이 있는 화려한 시대다. 수말당초 영웅들의 축록중원은 이미 수많은 드라마와 장르 소설에서 다뤄졌고, 초기 무협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규염객전>의 배경이기도 하다. 태종 이세민과 무측천 이야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당나라 퇴마사> 이야기는 무측천이 퇴위한 뒤 황위에 복귀한 중종 치하에서 시작한다. 비록 이세민 사후지만, 이세민 때의 일이 자꾸 언급되므로 그 시기에 관심 있는 사람도 흥미롭게 볼 수 있다.

스포일러에 주의하세요!

등장 인물들

원승

당시 사대 도문(도술을 하는 문파) 중 하나이자 국사를 배출한 영허문(홍강 진인이 이끄는 곳이라 '홍문'으로 불리기도 한다)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로, 홍문제일인이라고 불린다. 도술을 배운 사람이지만 출가한 도사는 아니니 오해하지 말자. 원승은 도술만 뛰어난 게 아니라 머리도 좋아서, 대부분 사건에서 한두 수 앞을 내다본다. 성격도 어찌나 온화한지 세상 모자란 게 없는 사람 같지만, 그런 그에게도 아픔은 있다. 바로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우며 더없이 귀한 여인, 안락 공주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 그는 평범한 관리 가문 출신이다 보니 황제와 황후의 사랑을 듬뿍 받고, 심지어 '황태녀'가 될지도 모르는 귀하디 귀한 공주와는 애초에 짝이 될 운명이 아니다. 그 때문에 원승은 기본적으로 울적한 캐릭터다. 오죽하면 처음 만난 육충이 '좀 즐겁게 사시오!'라고 충고했을까. 

<지옥변> 벽화 사건이라는 기괴한 살인 사건이 벌어져 도술과 추리에 능한 그가 사건을 해결하자, 나라에서는 '괴상한 사건을 담당하는 관청'인 '퇴마사'를 세우고 원승을 수장으로 임명한다. 짝사랑하는 안락 공주가 권력에 매혹되어 자꾸만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서, 원승은 조정에 들어가 그녀를 구하기로 한다. 하지만 안락 공주와의 관계는 조정에서 그의 위치를 흔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육충

당시 사대 도문 중 하나인 검선문의 제자로, 솔직담백하고 혈기 넘치며 큰소리 떵떵 치기를 좋아하는 호한이다. 검선문은 사대도문 가운데 전투용 도술이 가장 많은 문파여서, 육충도 퇴마사 일원 중에 몸으로 싸우는 일을 주로 맡는다. 처음 보면 <초류향>의 호철화 같이 그냥 인생 내키는 대로 사는 사람 같지만, 사실은 일찍부터 임치군왕 이융기에게 투신해 정치적인 성향을 정한 사람이다. 원승도 그를 통해 이융기와 안면을 튼다. 원승을 세상에서 가장 두꺼운 가면을 쓴 사람이라 속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오해를 했다가도 금세 그 진심에 감동하며, 쉽사리 친구를 배신하지 않는다.

대기

페르시아 환술 배우이며, 태어날 때부터 강한 영력을 타고난다는 영혜여인 출신이다. <장안 24시>에도 페르시아 여인 단기가 나와 활약한 것처럼, 당나라 때는 외국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았고 조정에서 일하는 외국인도 있었다. 대기는 <장안 24시>의 단기에 비하면, 훨씬 자유분방한 스타일로, 굳이 따지자면 원승보다는 육충과 비슷한 성품이다. (육충 마저, 그녀가 가면이 가장 얇은 사람이라고 할 정도)

종상부 소속 청양자에게 붙잡혀 와 인간방패가 될 뻔했는데, 원승과 육충의 도움으로 살아나 <지옥변> 벽화 살인 사건에서 페르시아인 모디로를 찾는 원승을 도왔다. 이를 계기로 그녀가 영혜여인임을 알게 된 원승은 끈질기게 그녀를 설득한 끝에 마침내 퇴마사로 초빙한다. 주로 힘 떨어진 원승에게 영력을 주입해주는 역할을 한다.

청영

육충의 연인으로, 가족의 원수를 찾기 위해 서시 환술극단에 몸을 숨기고 있다. 복수를 위해 한 때 온갖 문파에 숨어들어 비술을 훔쳐 배웠기 때문에 깊이는 없어도 다양한 도술을 할 줄 알며, 도술에 관한 지식도 많다. 독립적인 성품이라 육충에게 집안의 과거사를 절대 알려주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기에 한번 헤어졌지만, <지옥변> 사건으로 도움을 청하러 온 육충과 다시 만나 결국 퇴마사 일원이 된다. 하는 일은 기본적인 사건 조사와 추적, 역용 잠입 등이다. 퇴마사 일원 중에서는 원승 다음으로 똑똑한 사람.

육충의 부탁을 받아 종상부 연회에 환술 배우로서 참석한 청영은 마침내 가족의 원수를 만난다. 그 후 그녀는 퇴마사에서 가장 위험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물이 된다.

오육랑

본래는 금오위 소속 암탐이었지만, 원승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퇴마사가 금오위 하위 관청으로 만들어지자 퇴마사 소속이 된다. 얼핏 보아 가장 개성 없고 능력이 떨어지는 인물로 보이지만, 그의 활약은 뒤로 갈수록 빛을 발한다. <당나라 퇴마사>에서 재미있는 부분이므로 스포 하지 않도록 여기서 끊자.

고검풍

원승의 사제이자 홍강 진인의 관문제자. 실력은 인정받고 있지만 아직 어려서 경험이 부족하다. 스승이 죽은 후 그 원인을 알아야겠다며 하산해서 원승이 이끄는 퇴마사에 들어간다. 작가 후기에서 언급된 것처럼, 분량 문제로 가장 묘사가 부족했던 인물이라 캐릭터성과 스토리가 조금 약한 편이다. 퇴마사에서 귀여움을 담당한다.

이융기

말해 무엇할까. 역사가 스포라는 말이 있듯이, 이 사람이 등장한 이상 독자들은 최종 승자가 누가 될지 훤히 알 수 있다. 이융기는 초반에 육충의 주공으로 등장했다가, 나중에 퇴마사가 금오위에서 독립하면서 퇴마사의 상사가 되어, 주인공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다. 조부인 고종, 백부인 중종, 아버지인 예종처럼 순수하고 사람 좋은 피를 이어받지 않고, 증조부인 태조 혹은 조모인 무측천의 피를 이어받은, 과감하고 냉철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순애보적인 면이 있어서, 곁에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옥환아에 대한 사랑을 오랫동안 간직한다. 죽어가는 옥환아에게 "내생에는 반드시 아내로 맞아주겠다"고 약속했는데, 비록 소설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훗날 그의 사랑을 듬뿍 받는 양귀비 양옥환에 대한 복선이다. 

안락 공주

역사에 어떻게 남겨졌든 간에 소설에 등장하는 안락 공주는 악인은 아니다. 자라온 환경도 그렇고, 어머니의 부추김도 있었기에 최고 권력자인 황제 자리에 욕심을 내긴 하지만, 교활한 계략을 꾸미거나 하는 성품이 못 된다. 천진난만하고 사람을 쉽게 믿으며, 원승을 자주 놀리지만 마음속으로는 무척 좋아해서 여러 번 위기에서 그를 구해준다. 이융기의 당륭정변 때 사서에는 "화장하다가 칼을 맞은" 것으로 묘사되지만 이 소설에서는 구하러 온 원승을 거절하고 가장 빛나는 모습으로 자결한다.


여기까지 주인공 측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실제 역사 사건을 다루는 만큼 등장인물이 너무 많은 데다 자세히 쓰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주인공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쓰지 않겠다. 

이야기 흐름과 몇 가지 사건

총 3권으로 된 <당나라 퇴마사>는 각 권을 상/하로 나뉘어 각기 한 가지 사건을 서술한다. 크게는 한 가지 사건이지만 사실상 다른 사건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사건으로 이야기를 열고, 그 사건을 담당하는 퇴마사가 처리하러 나섰다가 정치/권력 싸움이 얽혀 있음을 밝혀내는 흐름이다.

<지옥변> 사건은 엽주에 빠져 꿈과 현실을 오가는 원승을 이용하려 드는 인물들과 얽혀 있고, <괴뢰고> 사건은 위 황후파와 이씨 황실파의 음지에서의 싸움을 담고 있다. <천마살> 사건에는 이세민의 죽음과 그 시대의 도술 고수들 이야기가 나오고, <요룡 군기물 탈취> 사건에서는 신비로운 사건으로 위장한 정치 세력의 음모와 사대 도문의 향방이 드러난다. <고양이 요괴> 사건은 배신과 배반 속에 결국 진실을 찾아 이융기가 승리하는 과정을 그렸고, 마지막 <가짜 황제> 사건에서 이융기를 중심으로 마지막 역사적 결론을 맺는다.

추리가 복잡하고 독자들에게 정보가 아주 적게 주어지므로, 다 해결된 뒤 원승의 설명을 듣기 전까지는 사건을 파악하는 것이 몹시 몹시 어렵다. 나도 두 번 세 번 보고서야 파악이 되어서, 여태 해온 작품 중에 초벌 번역과 재벌 번역의 차이가 아주 크다. 초벌 번역할 때는 도대체 이걸 누가 이해하라고 쓴 거지, 하는 생각이었지만 재벌 번역할 때는 생각보다 딱딱 떨어지는 이야기가 놀라웠다.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많고, 역사까지 얽혀 있어서 처음 보면 혼란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숫제 번역본을 넘길 때 나도 정리할 겸 등장인물 관계도를 그려서 포함시켰더랬다. 부디 그 그림이 독자들의 이해해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물리쳐야 할 '마'는 무엇인가

첫 번째 <지옥변> 사건이 끝난 뒤, 육충은 원승에게 자신의 소속을 밝히며, 위 황후파가 꾸미는 "천사책(天邪策)"을 알아내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천사책은 위 황후파가 정권을 잡는 무시무시한 책략이다. 본래 이 작품의 제목은 대당벽사사(大唐辟邪司)로, '벽사'는 흉함을 쫓아내는 신수의 이름이자 '사악한 것을 제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악한 것이란 마귀일 수도 있고 악당일 수도 있다. 처음에 퇴마사라는 관청을 세운 것은, 그런 귀신의 소행 같은 요사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도술에 능한 사람을 모으기 위함인데, 실상 퇴마사에 속한 사람들이 하는 일은 정치 세계 곳곳에 숨은 사악한 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천사책에 '사'가 들어가 있고, 주인공이 속한 퇴마사, 즉 원문상 '벽사사'에도 '사'가 들어가 있듯, 천사책을 만든 자는 당연히 퇴마사 사람들의 적이 될 것이다. 

 

신수, 벽사. (출처: 바이두 백과)

 

 


<당나라 퇴마사>는 무협과 추리와 역사를 잘 버무렸다고 평가받는 소설이다. 내가 가장 재미를 느낀 부분은 역사적 사건을 도술과 미스터리에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만든 것인데, 예를 들면 태종 이세민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나 중종의 죽음 같은 것이다. 이미 있었던 역사도 보는 시각이나 해설에 따라 완전히 새롭게 느껴지게 만들 수 있고, 그런 점이 역사적 사건을 보고 또 보게 만드는 것 같다.  

마침 비슷한 시기를 다룬 소설이 많이 소개되어 연속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당나라의 문화 요소를 잘 이용한 점에서는 <장안 24시>와 비슷하고, 사건 추리에서는 <잠중록>을 연상할 수 있다. 보지는 못했지만 현대인이 당나라에 가서 활약하는 <대당여법의>도 있다. 이런 작품들을 재미있게 읽었다면, 아마 <당나라 퇴마사>도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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